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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5회 조지훈예술제, 경북 영양 주실마을에서 개최
        올해로 15회를 맞는 민족시인 ‘조지훈예술제’가 단풍진 가을 시월의 정점인 22일과 23일 펼쳐진다.   시인이자 문학가, 역사학자로서 청정한 지조의 삶을 지켜온 조지훈의 정신과 얼을 다시 반추해보는 조지훈예술제에서 백년의 후배들은 무슨 생각을 그려낼까.   ‘백일장과 사생대회’가 조지훈예술제 첫날의 문을 연다면 이튿날은 ‘조지훈시 퍼포먼스대회’가 기다리고 있다.   지금으로부터 약 한세기전 일제치하 격랑의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문학으로 승화시킨 그의 순수한 서정과 민족정신, 대쪽같은 지조를 이땅의 후학들은 어떤눈으로 바라볼까.   이날 행사가 열리는 ‘조지훈 문학관’이 소재한 주실마을 일대는 모처럼 조지훈의 발자취를 쫓으려는 학생들과 관광객, 그리고 문학인들의 발길로 넘실댈것으로 보인다.   이쯤에서 이제는 역사가 되어버린 시대의 사상가 조지훈의 발자취를 쫓아보자.     ▲ 조지훈의 고향, 영양 ‘주실마을’   영양읍내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조지훈의 고향 주실마을. 영양 일원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곳에 5백여년동안 선비의 지조를 지쳐온 주실마을이 고풍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때 환란을 피해 정착한 한양 조씨들의 집성촌으로 1630년경 마을이 형성됐는데 하늘에서 내려다 본 마을모습이 마치 배모양을 띠고 있어 주실(主室), 또는 주곡(主谷)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2개의 종택이 있는데 옥천종택(玉川宗宅)과 호은종택(壺隱宗宅)이다. 옥천종택은 조선 숙종 17년(1671)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와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의 집이다.   옆 골목 호은종택이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生家)이다. 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들어온 입항조 조전(趙佺)의 둘째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때 지은집이라고 소개돼 있다.    당시 호은종택에 사는 조씨를 가리켜 칼날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렸으며, 일제강점기때도 끝까지 창씨계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마을로 지금까지 칭송이 드높다고 한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조상들의 대쪽같은 선비정신, 그 올곧음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때문이 아닐까.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호은종택 마당에 들어서니 따스한 영양의 햇살과 산들바람이 먼저 나그네를 맞는다. 발목아래 서걱거리는 자갈소리. 주인은 없지만 포근한 인심은 남아있는 듯 빈집의 허전함이 없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문화유산이지만 지금도 누군가 방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할 듯 아늑함이 배어있다.      그가 앉았을 툇마루에서 앞산을 바라본다. 풍수가들이 집앞 안산에 놓인 봉우리들이 전형적인 ‘문필봉’이여서 조지훈이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붓끝처럼 봉긋 솟은 저 앞산을 바라본다.   산은 그에게 무엇을 보여줬을까. 구름은 그에게 어떤 행로를 보여줬을까. 이 산간오지 마을에서 자란 그가 어떻게 한국문학사의 거장이 되었을까. 일제와 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그는 어떻게 변절하지 않고 순수문학과 민족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을까.   집 뒤로 오래된 감나무가 고목처럼 서있다. 아무래도 그가 어릴때 심었음직한 나무인 듯, 겹 껍질이 세월의 풍상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생명의 소리. 감나무는 주인을 대신해 홀로 생명의 지조를 지키고 서 있는 듯하다     ▲ 조지훈 문학관    호은종택에서 1백여m 거리에 그의 삶과 문학, 지조의 일생을 담은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입구에서 나그네를 단숨에 잡는 것은 그의 시 승무(僧舞).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근대 대한민국의 대표시 승무가 인사를 한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라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중략)」    이 처절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의 아프도록 순수한 서정과 청아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 자리에 서서 동탁의 그날 밤을 그려보니 답이 나왔다. 바로 이곳, 영양이 그를 빚었다. 하늘아래 첫 동네, 청정한 하늘과 백두대간의 숲에서 나오는 산소바람, 그리고 기름진 땅과 별들의 속삭임.   조지훈의 발자취는 격동의 역사, 그 파도에 맞서온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틈틈이 서구학문을 탐독하던 그는 1939년 약관 19세의 나이에 시인 정지용에 의해 그의 시 「고풍의상」이 “문장”지에 추천되면서 등단하게 됐다.    이후 한국민족시를 대표하는 ‘승무’와 ‘낙화’ ‘ ‘고사’와 같은 명시를 포함, 박목월, 박두진과 활동하면서 엮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앞에서’ ‘여운’ 등 수많은 보석같은 시집을 역사앞에 내놓았다.   시인이자 문학가, 역사학자로서의 삶이 그의 발자취라면 그의 ‘지조론’은 민족과 겨레를 향한 그의 양심이자 생(生)의 지표였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시인 조지훈이 평생을 두고 지켜온 지조적 삶을 엮은 논설집 “지조론”에서 그가 말한 내용이다. 6.25 전쟁후인 1950년대 후반, 자유당 정부시대의 혼탁한 정치환경과 지도자들의 변절을 본 그가 세태를 비판한 송곳같은 글이다.      격랑의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수한 서정과 민족정신, 대쪽같은 지조를 지켜온 그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가 말했던 시대의 변절자들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인가. 세월은 가고, 강물은 흘렀지만 새로운 변절자들과 시대의 야바위꾼들은 또 어둠속에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어쩔수 없는 세상의 운명인가.    지금 이 시대, 삶이 뿌리채 흔들리는 이 혼탁한 세상에 강력한 순수성으로, 뜨거운 민족정신으로, 한밤에 추는 승무앞에서 용솟음치는 처절한 슬픔처럼 시대의 양심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조지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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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2022-10-09
  • 제11회 오일도 전국백일장, ‘민족의 한을 울컥울컥 시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민족의 한을 울컥울컥 시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를 기리는 전국백일장이 올해도 개최된다. 9월24일 오전10시 시인 오일도의 고향마을인 경북 영양읍 감천리에 소재한‘오일도 시공원’에서 영양문인협회(회장. 오용순) 주최로 열한번째 백일장이 열린다.   초등부와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 대상으로 한 백일장과 아울러‘문학, 교감의 능력과 따뜻한 상상력’주제로 영남대 국문과 김문주 교수의 문학특강, 청소년들의 시낭송과 장기자랑을 볼 수 있는 청소년문화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즈음에서 오일도의 생애를 보자. 영양이 낳은 불세출의 낭만시인 오일도 그는 누구일까. -------------------------------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일도 생가   가을햇살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아직 여름을 잊지못한 늦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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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2022-09-22
  • 지훈문학관 여름성수기 연장운영 실시
      영양군은 여름철 휴가기간에 맞추어 7월 18일부터 8월 22일까지 정기휴관일 없이 지훈문학관을 정상 운영한다고 밝혔다.   2007년에 개관한 지훈문학관은 청록파 시인이자 지조론의 학자 조지훈 선생을 후세에 길이 기리기 위해 건립한 문학관으로 조지훈 선생의 삶과 정신을 살펴볼 수 있는 다양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이번 연장운영은 여름철 휴가기간을 맞아 지훈문학관을 찾는 방문객들에게 최대의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실시하게 됐다.   한편 지훈문학관이 위치한 주실마을에는 조지훈 시인의 생가인 호은종택과 지훈시공원, 시인의 숲 등의 명소가 있으며 20분 거리에 아시아최초 밤하늘 보호공원인 영양국제밤하늘보호공원과 영양죽파리 자작나무숲이 위치해 있어 여름철 지역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에게 풍성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오도창 영양군수는“올 여름 지훈문학관과 주실마을에 방문하여 한국 현대 시의 주류를 완성한 청록파 시인 조지훈 선생의 시 세계에 흠뻑 빠져 풍요로운 휴가를 보내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 뉴스투데이
    • 사회
    2022-07-18
  • 영양문인협회, 2021년도 ‘영양문학’ 37호 발간
      문향의 고장, 영양의 자존심,  ‘영양문학’ 37호가 발간됐다. 올해로 37년째, 지난 1985년 창간호가 나온 이래 햇수만큼이나 37년의 연륜을 지닌 문학잡지다.   지방문단에서 이만큼 오랜 연륜을 지난 문학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영양문학’은 이름만으로도 국내 문단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영양지부, 즉 영양문인협회(회장·오용순)가 ‘영양문학’의 주체다. 회원은 모두 60여명. 인구 1만6천여명의 전국 최소단위 자치단체에서 이끌어가는 문단이지만 회원수는 웬만한 시단위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시인이자 영양문인협회를 이끌고 있는 오용순 회장은 “영양은 민족문학의 거목인 조지훈 선생을 비롯 오일도 시인과 현존하는 한국문단의 보배인 이문열 작가를 배출한 자타가 인정하는 문향의 고장”이라며 “국내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지역문인 등 다양한 회원들이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37회째 발간된 2021년도 ‘영양문학’은 기획특집으로 영양군 청기면 출신의 김선굉 문학평론가(대구시인협회장)의 「영양문학의 원류를 찾아서 3」 란 주제의 평론과 유명시인들의 초대시, 영양을 사랑하는 문인들의 시작품 등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회원들의 투고작품과 올해 개최된 ‘오일도 전국 백일장’ 당선작들이 실렸다.   한편 영양문인협회에서는 2022년도 신입회원모집과 새해 발간될 ‘영양문학’ 제38호에 게재할 원고를 접수한다고 밝혔다.   모집분야는 시, 시조, 동시, 수필, 단편소설, 평론, 기행문 등이며, 경북 영양군 영양읍 군민회관길 7 영양문화원 4층소재 영양문인협회로 보내거나 이메일(yjo00362hanmail.net)로 보내면 된다. 연락처는 054, 683-0036.  
    • 뉴스투데이
    • 사회
    2021-12-18
  • [ 사설 ] 여름 피서, 영양으로 초대합니다
    코로나 시대 여름 피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코로나 청정지역인 영양을 추천한다.   산발적으로 확진자가 발생했지만 한자리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대부분 외지에 주소를 둔 이들의 감염이었다.   경북지역 타 시군에 비해서도 영양군은 코로나 청정지역이다.   이런 영양군이 바로 코로나 시대 멋진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어린시절 추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양국제밤하늘보호공원’은 최고의 여름선물이 될 수 있다.   아시아에서도 가장 맑은 별을 볼수 있는 이곳에 오면 반딧불이 천문대에서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찾을 수 있다.   피로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밤하늘보호공원은 그야말로 순백색의 자연을 오롯이 체험할수 있는 가족무대가 될 것이다.   뿐만인가. ‘문향의 고장 영양’ 이란 슬로건이 말해주듯 ‘승무’의 시인 조지훈생가와 현존 문학계의 거목 이문열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학을 사랑하고 자연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관광코스가 어디 있겠는가.   수비면에 위치한 죽파리 자작나무숲도 알려지지 않은 보석이다.   하얀자작나무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폐부깊숙이 찌든 스트레스와 삶의 찌꺼기들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신선함을 맛볼수 있을 것이다.   물놀이 장소도 즐비하다. 수하계곡과 선바위관광지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여름 휴식처로 유명하다.   국립검마산자연휴양림은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은 찾는 곳이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과 청송·봉화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을 걷다보면 여름더위와 코로나 걱정에서 해방될수 있을 것이다.
    • 여론마당
    • 사설
    2021-07-21
  • 【시론】 영양출신 인재는 많은데...
    추석이다. 어머니의 땅, 아버지의 숨결이 있는 고향을 찾는 이들이 많은 시간들이다. 영양에 뿌리를 둔 출향인들의 자부심은 뭘까.   궁벽한 경북내륙지역에서 태어나 경향각지에서 저마다의 노력으로 삶의 뿌리를 내린 출향인들에게 영양은 잊지 못할 노스텔지어이다.   비록 서울처럼 화려한 조명도 없고, 마천루같은 빌딩도 없지만 어린시절 추억을 담은 반딧불이가 희미하지만 생명의 빛을 내뿜고, 고향매미가 가을까지 울어대는 정겨운 곳일 게다.   그것뿐인가. 영양은 문향의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민족시인 조지훈의 영혼이 서려있고, 영원한 낭만시일 오일도가 1백년의 모습으로 여전히 그의 고장에서 출향인들을 맞고 있다.   이문열은 어떠한가. 한국문단의 거장으로 ‘사람의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살아있는 영양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를 움직이는 정치권에도 영양의 뿌리는 공고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지금도 여전히 여야 정치권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 이재오 전 의원 역시 영양출신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경제, 문화계 등 어느 곳이든 영양출신들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넓고 깊다.   이런 출세한 영양인들이 많지만 지금 그들의 고향, 영양의 현실은 날이 갈수록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늙고 병들어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가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는 급감하고 있다. 마치 땅속에서 나온 매미가 벗어버린 허물처럼 그렇게 껍질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이 영양의 현주소다.   풍성한 한가위 추석이지만 그들의 기억속 유년의 푸르름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영양을 살릴 방도를 찾아봐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듯 이제 성공한 자식들이 고향을 돌봐야 한다. 일월산의 정기와 햇살을 받으며 자란덕분에 지금의 영광이 있음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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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16
  • 내고향 영양 풍경展…금동효 화가 초대전
    영양군은 8월 1일(목)부터 31일(토)까지 일월면 주실마을 승무관에서 금동효 화가 초대 “내고향 영양 풍경展”을 개최한다.   【이상형 기자】영양군은 8월 1일부터 31일까지 일월면 주실마을 승무관에서 금동효 화가 초대 ‘내고향 영양 풍경展’을 개최한다.    본격적인 여름 휴가철을 맞아 기획된 이번 전시회는 지훈 문학관이 위치한 주실마을 승무관에서 8월 한달동안 영양의 풍경을 담은 20여점의 수묵화가 전시될 예정이며 관람시간은 오전 9시부터 저녁 6시까지로 관람료는 무료이다.    초대작가 금동효 화백은 한국화가로 영양군 수비면이 고향이며, 지난 5월 개최된 제13회 조지훈예술제에서도 영양의 아름다운 자연풍경을 담은 작품전시회로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관심을 받았다.    이번 전시회‘내고향 영양 풍경展’은 영양의 산수진경이 작가의 섬세하고 유려한 붓끝으로 되살아나 우리에게 영양의 아름다운 풍경을 아늑하고 담백한 수묵담채화로 보여준다.    금동효 화백은“내고향 영양의 풍경으로 꾸준하게 작품활동을 하고 있으며, 외가가 있는 주실마을에서 전시회를 개최하게 되어 더욱 뜻 깊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경해 문화관광과장은 “이번 전시회로 지역민의 문화향유기회 확대와 주실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새로운 볼거리와 영양관광 홍보에도 기여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했다. 지훈 문학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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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
    2019-08-01
  • (창간특집) 민족의 한(恨)을 울컥울컥 시(詩)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시인 오일도 시비  【정승화 기자】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의 고향 마을인 영양군 입암면 감천리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마을어귀 연꽃풍경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닝 오일도 동상과 시  △오일도 생가 여름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7월의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시인 오일도 생가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오일도 시인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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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8
  •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출처=영양군)   【정승화 기자】영양군문인협회(회장 양희)가 주관하는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가 7월 27일부터 28일까지 자연생태공원에서 개최됐다.   문향골 문학캠프는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고 문학적 소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문학행사로 자유롭게 문학을 논하고 창작하며, 문향의 고장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행사다.   이번 문학캠프는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김선굉 시인의 문학특강과 김경종 선생의 “그리움도 가져가!”, 정중수 교수의 “조지훈과 지조론”등의 문학 강연이 이어졌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또한 별빛이 아름다운 국제밤하늘 보호공원 내 반딧불이 천문대 탐방과 자연생태공원 산책 등 자연 속에서 문학의 소양을 높이는 시간과 문학캠프 체험을 글로 표현하는 백일장을 갖는 등 문학과 자연을 함께하는 일정에 더해 지훈문학관 탐방으로 진행됐다.   양 희 영양문인협회 회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가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가 열의로 문향의 고장을 알리는 문학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문학행사에 대한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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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6

여론마당 검색결과

  • 〈일월칼럼〉 문향골 캠프에서 펼쳐지는 ‘별이 빛나는 밤에’
        『너와 내가 맹세한 사랑한다던 그말/너와 내가 맹세한 사랑한다던 그말   차라리 듣지 말 것을 애당초 가지 말 것을/사랑한다는 그말에 모든 것 다버리고   별이 빛나는 밤에 너와 내가 맹세하던말/사랑한다는 그말은 별빛따라 흘렀네   머나먼 하늘위에 별들이 빛나는 밤/그리워요 사랑해요 유성처럼 사라져버린 별이 빛나는 밤에 너와 내가 맹세하던말/사랑한다는 그말은 별빛따라 흘렀네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   이제는 원로 가수이자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가수 윤항기씨의 히트곡 ‘별이 빛나는 밤에’ 가사 전문이다.   여동생 윤복희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윤항기가 청년시절인 1960년대,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결국 일생일대 그의 출세곡이자 아직도 시대를 넘나들며 많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인기대중가요다.   50대이상 중년이나 예순과 고희의 인생길을 오르내리는 어르신들에게 윤항기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머릿속에 각인된 오래된 레코드판처럼 흥얼거릴 수 있는 추억의 노래다.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의 무대는 별밤. 윤항기에게 별은 어쩌면 가장 빛나는 절정의 사랑이자 행복을 표현하는 정수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별은 변치 않는 맹세도 되었다가 하릴없이 흐르는 별빛은 또 이별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이 노래가 반세기이상 대중적 인기도를 유지해온 비결도 바로 ‘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이들은 가슴속에 저마다의 별을 간직하고 있다. 꿈이 되기도 했다가 사랑이 되고, 또 이별의 추억도 결국에는 별빛으로 담긴다.   가수 윤항기가 별로 청춘의 사랑과 이별을 그렸다면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도테 역시 세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소설 ‘별’에서 청춘의 사랑을 그렸다.   『나는 아가씨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저 수많은 별들 중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곤히 잠들었노라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목동의 어깨위에서 잠이 든 별은 스테파네트 아가씨다. 목동에게 그녀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별인 셈이다.   순박한 한 목동의 젊은 날의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천상과 지상, 별과 인간을 대비시켜 인간의 꿈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서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별이 없었다면 윤항기의 사랑과 이별, 알퐁스 도테의 양치기소년의 순정도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뤼브롱이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이 마을은 매우 높은 산지위에 자리 잡고 있어 밤하늘 별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의 뤼브롱 만큼이나 아름다운 밤하늘을 간직한 곳이 경북 영양군이다. 이미 지난 2015년 국제밤하늘협회가 공인한 ‘별의고장’이다.   영양의 밤하늘 별과 반딧불이는 어디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국보급 고유자산이다. 여름밤 영양 밤하늘에서 별을 바라보면 심연 속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소리와 빛을 가슴가득 느낄 수 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별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어머님,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명시 ‘별 헤는 밤’을 영양의 밤하늘에서는 절로 느낄 수 있다. 문향의 고장 영양의 모든 것을 음미할 수 있는 전통행사인 ‘문향골 캠프’는 그야말로 별을 노래하는 시간들이다.   이제는 별이 된 낭만시인 오일도와 지조시인 조지훈의 역사, 아직도 현존하는 문학의 큰별 이문열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양은 그 자체로 한국문학의 자존심이다.   장엄한 일월산과 깊고 그윽한 수비계곡의 신비, 영혼을 씻어주는 자작나무숲길은 왜 영양이 문학의 향기로 가득한 고장인지 알려주는 비경들이다. 주말 문향골 캠프는 잃어버린 나만의 별을 찾을 수 있는 마음채움의 시간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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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07-27
  • 〈일월칼럼〉 사월과 오월사이, 그리고 그네들의 봄
        (#풍경하나)   2년째 봄을 잃어버렸던 세상에 다시 봄이 찾아온듯하다. 코로나19가 앗아간 잃어버린 봄. 겨울의 을씨년 시간들을 보낸 이들에게 봄이 가져다준 저 신록의 찬란함을 어찌 창문으로만 보고 있을 것인가.    답답했던 마스크도 벗어던지고 당장 문을 열고 세상을 향해 종주먹을 내지르고 싶은게 모든 이들의 마음일게다. 그러나 아직까지 아귀같은 코로나19가 밤도둑처럼 옮겨 다니고 있어 조심해야겠지만 전국적으로 급격하게 확진자가 줄어들고 있어 다행이다 싶다.    정부차원에서도 사회적 거리두기를 해체하는 등 엔데믹 수순을 밟고 있어 원래의 삶을 되찾을 날도 멀지 않은 듯 하다. 때마침 천혜의 자연풍광을 자랑하는 영양에서도 지난 2년동안 사실상 중단됐던 ‘산나물축제’를 다시 재개한다고 하니 얼마나 반가운 일인가.    일월산을 필두로 골짜기마다 솟아오른 곤드레나물과 고사리, 참나물, 당귀, 그리고 하늘로 샘솟듯 푸른기운을 내뿜는 두릅을 보라. 동장군의 맹위 속에서도 그네들은 소리없이 저마다의 봄을 준비해 온 것이다.   개나리와 진달래, 참꽃이 봄을 열었다면 신록의 사월과 오월은 무공해의 산나물이 봄의 절정을 채색한다. 태산같이 높이 솟은 저 일월산의 준엄함 속에 이렇듯 아스라한 봄의 향취들이 곳곳에 스며들어 있는 것이 그저 신비롭기만 하다.   영양의 봄을 노래한 이가 있다. 영양이 낳은 민족시인 조지훈은 ‘낙화’에서 바람에 떨어지는 꽃잎과의 이별을 애달파했다.     꽃이 지기로소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뒤에 머언 산이 다가선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아직도 외줄기 도로에 갇혀있는 이 궁벽한 영양. 1백년전 일제치하 시인의 세상은 얼마나 답답했을까. 그의 눈에 들어온 봄날 꽃잎서정, 봄소식을 전하듯 봉긋한 꽃망울과 활짝핀 매화와 진달래는 시대의 아픔을 지녔던 시인에게 선뜻 다가온 소소한 일상의 기쁨이었을 것이다.   기쁨도 잠시 한잎 떨어지는 낙화의 순간을 시인은 가슴아파한 것이다. 가슴아파한다. 파란 산나물이 저 봄꽃 낙화의 허망함을 메워주기까지 시인은 얼마나 허망했을까. 야속한 바람은 그때도 불었고, 지금도 일월산 계곡사이로 범 소리를 내며 내달리다 반변천 물길을 따라 동해로 빠져나가고 있다.   (#풍경 둘)   누군가에게 봄은 신록찬연한 생명의 봄이지만 어떤 이들에게 봄은 전쟁이다. 2022년 사월과 오월사이, 소위 위정자들의 봄은 공천전쟁으로 몸살이다.   예나 지금이나 TK지역에서 변함없는 것은 바로 간판만 바꾼 ‘국민의힘’의 공천권 확보. 어떤 이들에게 봄은 홍매와 진달래가 꽃이지만 이들에게 꽃은 ‘선거’다. 민주주의 꽃이라고 불리는 선거에 몸이 달은 그네들에게 진짜 ‘봄꽃’이 눈에 들어올 리 있을까. 중앙이든 지방이든 권력의 늪에 빠진 탐욕의 ‘꾼’들은 그들만의 정쟁에 정작 봄이 오는지도 가는지도 모를 것이다.   지금 중앙정치권에서는 ‘검수완박’이라는 듣보잡 언어가 한국사회를 뒤흔들고 있다. 더불어민주당이 거대의석을 무기로 ‘검사들로부터 수사권을 완전 박탈한다’는 검수완박으로 야당까지 꼬드기다 들통나 정치권이 온통 쑥대밭이다.    물러가는 대통령과 이재명 전 대선후보를 보호하는 법안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법리적모순을 안고 있는 이법안에 새정부의 실세인 국민의힘 권성동 원내대표가 덜컥 합의해줬다 국민적 몰매를 맞고 있다.    문재인 5년치하의 적폐청산을 염원으로 검찰총장 출신 윤석열 대통령을 당선시켰는데 정작 야당에서는 한번 저항도 하지 않고 합의하면서 ‘야합’이라는 비판과 여름소나기처럼 쏟아지고 있다. 자칫 윤석열 새대통령은 취임도 하기전에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할 지경이다.   6. 1 지방선거를 앞둔 전국 각 지방에서는 공천후유증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대표적인 곳이 국민의힘 공천이 곧 당선으로 직결되는 TK지역.   지금 대구에 소재하나 국민의힘 경북도당앞은 연일 공천탈락자들과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데모를 하는등 공관위 국회의원들과 갈등을 빚고 있다.   어떤이들은 ‘컷오프’를 당했다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또 어떤 지역에서는 분명한 근거없이 특정인을 전략공천격인 ‘단수추천’을 하는 바람에 나머지 후보들이 벌떼처럼 일어나고 있다.    이들에게 정작 표를 가진 국민은 뒷전이다. 공천만 받으면 당선은 따논 당상이니 주권자가 후순위로 밀리는 이상한 민주국가이다. 봄은 왔는데 이들에게 봄은 아직 겨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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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4-29
  • [ 사설 ] 여름 피서, 영양으로 초대합니다
    코로나 시대 여름 피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코로나 청정지역인 영양을 추천한다.   산발적으로 확진자가 발생했지만 한자리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대부분 외지에 주소를 둔 이들의 감염이었다.   경북지역 타 시군에 비해서도 영양군은 코로나 청정지역이다.   이런 영양군이 바로 코로나 시대 멋진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어린시절 추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양국제밤하늘보호공원’은 최고의 여름선물이 될 수 있다.   아시아에서도 가장 맑은 별을 볼수 있는 이곳에 오면 반딧불이 천문대에서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찾을 수 있다.   피로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밤하늘보호공원은 그야말로 순백색의 자연을 오롯이 체험할수 있는 가족무대가 될 것이다.   뿐만인가. ‘문향의 고장 영양’ 이란 슬로건이 말해주듯 ‘승무’의 시인 조지훈생가와 현존 문학계의 거목 이문열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학을 사랑하고 자연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관광코스가 어디 있겠는가.   수비면에 위치한 죽파리 자작나무숲도 알려지지 않은 보석이다.   하얀자작나무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폐부깊숙이 찌든 스트레스와 삶의 찌꺼기들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신선함을 맛볼수 있을 것이다.   물놀이 장소도 즐비하다. 수하계곡과 선바위관광지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여름 휴식처로 유명하다.   국립검마산자연휴양림은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은 찾는 곳이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과 청송·봉화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을 걷다보면 여름더위와 코로나 걱정에서 해방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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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1
  • [발행인 칼럼] 영양신문 창간 1주년에 부쳐!
    이기만 영양신문 발행인/(주)경북미디어 대표이사 이제 다음달이면 영양신문이 창간한지 꼭 1주년이 된다. 지난해 7월 3일 첫 창간호를 발간한지 어제 일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긴 하다싶다.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영양군민들의 성원과 격려덕분에 무사히 안착을 하고 지역신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향인 처럼 격의 없이 대해준 지역민의 덕분임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작은 군단위 영양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지역보다 영양에서 지역신문이 발간돼야 함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에서 지역신문이 없는 유일한 곳이 영양군과 울릉군이고 보니 필자는 우리지역 영양군에 우선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하고 명분 있는 일임을 자각해 오랜 준비 끝에 지난해부터 지역신문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   봄이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이 한올 한올 알토란같은 소식을 물어 집집마다 배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찾아뵙지 못한 가정도 많아 늘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언론인으로서 그것도 지방언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에 더욱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않은 게 현실이다.   당장 손쉬운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면 되는데 구태여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예의와 영양군의 자존심으로 내건 영양신문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비록 영양에 본사를 둔 작은 신문사이지만 어떤 지역신문과 견줘도 정당하고 분명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자칫 유혹에 빠지기 쉬운 금권과 편향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직 영양군민들의 언로(言路)의 역할에 충실한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음을 감히 자부해 본다.   우리지역 영양의 경우 젊은이 보다 어르신들이 많아 인터넷이나 SNS에 익숙치않아 지면신문이 정보습득에 훨씬 효용성이 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북도내 포항이나 구미, 안동 등 도시지역의 경우 젊은 층 인구가 많아 속도성을 자랑하는 인터넷사용을 많이 하고 이를 통해 정보습득을 많이 하지만 농어촌지역의 경우 아직까지 지면신문을 애용하는 실태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영양지역 곳곳을 누비며 신문을 배달하다보면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손을 맞잡아주시고, 고생한다고 음료수도 건네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인정을 영양에서는 흔치않게 볼 수 있는 것도 큰 횡재라 생각한다.   또 영양의 위대함은 바로 문향의 고장이라는데 있다. 민족시인 조지훈과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한국문학의 거목 이문열을 배출한 영양의 힘. 음식디미방으로 잘 알려진 경북의 어머니, 여류문학의 대명사인 장계향 선생의 저 두들언덕에 서면 왜 영양에 신문이 있어야 되는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본지는 지면신문과 인터넷 영양신문 등 이원화 시스템으로 지역뉴스를 공급하고 있는바, 인터넷으로는 매일매일 신속한 정보를 지역민들에게 알려주고, 지면신문은 격주 간으로 모아 집앞까지 배달하고 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보시기 편하도록 활자를 크게 해서 영양군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면도 많은 게 사실이다. 지역언론의 특성으로 군청 소식을 가급적이면 많이 실어서 영양군정을 지역민들에게 잘 홍보하는 역할도 겸용하고 있음을 말씀드린다.   언론이 비판기능에 충실해야 된다지만 먼저 정보전달의 매개체로서 충실히 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영양신문은 실천하고 있다.   오도창 군수님을 비롯한 영양군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이종열 도의원님, 김형민 영양군의회의장님과 의원님들의 성원과 격려에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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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6-04
  • 【발행인칼럼】농어촌 특산물축제 중단, 정부차원에서 대책 강구하라.
    이기만 영양신문 발행인 코로나 사태가 가뜩이나 힘든 농어촌지역을 더욱 위축시키고 있다. 수도권이나 도심지역의 경우 철강, 전자 등 주력 산업군이 있어 당장 심각한 경제적 어려움은 다소 덜하지만 농어촌지역은 사정이 다르다.   농업이 주 소득원인 농어촌 주민들에게 특산물의 판매는 유일한 소득원이다. 계절별 특산물을 판매해 수익을 올리지만 이미 전국적인 명성이 있는 만큼 많은 외지 관광객들이 특정 지역을 찾으면서 부가가치도 상당하다.   출향인사들이나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그 지역을 방문하면서 숙박업과 도·소매업 등 다양한 경제전반에 미치는 파급효과가 있어 특산물 축제를 통해 각 지자체가 거둬들이는 경제적, 문화적 효과가 상당한 것이다.   경북도에서도 올해부터 각 시, 군별 외지 관광객유치에 적극 나설 계획이었으나 코로나 사태의 발생으로 이마저도 여의치 않게 됐다. 경북도내 시군 가운데 주요 봄철 특산물축제를 꼽으라면 영양 산나물축제를 대표로 말할 수 있다.   계절의 특성인 봄, 청정 영양 일월산 일대에서 채취되는 산나물은 도시 소비자들이니 출향인들이 매년 봄만 되면 영양을 찾는 이유가 되고 있다.   더욱이 영양군은 축제기간 중 영양이 낳은 민족시인 조지훈 문학제도 함께 개최하고 있어 경제적 효과와 함께 문화적 가치도 드높이는 기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그러나 코로나 여파로 이 같은 ‘영양산나물축제’가 전면 중단되면서 당장 산나물판로가 불투명한 실정이다.   전체 채취물량의 절반이상을 축제기간에 소비해온 영양군으로서는 주민들의 코로나 감염을 차단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축제를 중단해야 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축제중단에 따른 판로를 뚫어야 하는 난관에 부딪히게 됐다.   경북도와 중앙정부에서는 영양군과 같은 농어촌 시군의 특산물을 소비하기 위한 특단의 대책을 마련해야 한다.   아직까지 코로나를 차단할 수 있는 치료약이 나오지 않은 상황에서 이같은 전염성질환을 예방하고 설령 감염된다 해도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면역력을 기르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봄철 산나물처럼 인체에 좋은 음식이 달리 있을까. 인체에 유해한 가공식품보다는 요즘 같은 시기에는 천연 자연식품인 영양산나물을 많이 먹을 수 있도록 적극적인 홍보가 필요하다.   영양군에서는 경북도와 협의해 영양에서 채취되는 ‘천연 면역력 산나물’을 적극 홍보해 지역 농업인들이 피해를 입지 않도록 대책을 마련하도록 권유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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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0-04-16
  • [일월칼럼] 사람 없는 문향의 고장, 영양
    정승화 주필/편집국장 세상이 날로 험악해지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해악을 가하는 천인공노할 범죄가 만연해지는 이 세상.   옛 어른들이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닐 성 싶다. 어떤 곳은 사람이 많아서 탈이 나고, 또 어떤 곳은 사람이 없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래저래 우리네 인생사는 불안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운명인가 보다.   세상이 달라졌다. 먹을 것 입을 것만 있으면 행복하다던 말은 전설이 되고 이젠 배만 불러서는 행복할 수 없는 ‘삶의 질’을 논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다보니 유행을 쫓아가게 되고 돈을 아무리 벌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부자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성의 시대가 가고, 물질의 시대가 오면서 우리들의 가치관도 흔들리게 됐다. 한 세기 전인 20세기만 해도 정신은 물질을 압도했다. 모든 것의 가치는 사람이 근본이었다.   문향의 고장 영양이 낳은 민족시인 조지훈과 한국문학사의 거목 이문열이 주목한 것도 바로 ‘사람’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바로 정신의 가치요, 이러한 정신은 바로 겨레의 자존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람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기 전인 지난1970년대 영양군의 인구는 역사 이래 가장 많은 7만7백여명을 육박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작은 시골지역에 7만여명의 인구가 밀집해 옹기 종기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이었을 것이다. 먹을 것만 있고 잠잘 곳만 있으면 행복했던 그 시절, 물질은 정신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울과 부산, 대구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늘면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이들이 늘면서 영양군의 위세는 반대로 작아지게 된다.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새로운 세상,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는 새로운 ‘질적행복’의 시대로 역사가 넘어가면서 오래된 고향은 그곳을 떠날 수 없는 부모님 세대의 땅으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산 좋고 물 좋은 내 고향은 추억 속에만 간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 영양의 아들딸들이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그 결과 이제 영원히 고향을 볼 수가 없는 운명의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영양이 인구절벽의 막다른 골목에 섰다. 야속한 시간은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이는 없고 어른들은 매년 수백명이 영원으로 떠난다. 고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언론에서는 시군소멸이니, 위기상황이니,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느니 말들을 하면서도 정작 뾰족한 근본해결은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어쩌면 정부차원에서도 어디 사람 없는 곳이 한 두 곳 이어야 말이지 웬만한 경북과 강원, 전라남북도 등 시골지역에 가면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이 위기의 순간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영양군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최소한 인구 2만명이라도 회복하자는 것이 영양군의 복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양군을 샅샅이 뒤져 한명이라도 주소를 이전하지 않은 이들을 영양군민으로 만들고, 영양출신 출향인사들의 귀농과 귀촌, 주소지 이전 등 다각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게 영양군의 복안이다.   영양군의 이번 인구증가 범 군민 운동이 반드시 성공해서 사라지는 영양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영양은 민족정신의 성지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시대를 압도한다고 해도 영양군이 든든히 존재한다면 정신은 살아있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토대위에서 세상의 이치와 인심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군을 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지금 영양군민들의 지상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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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9-12-10
  • 【시론】 영양출신 인재는 많은데...
    추석이다. 어머니의 땅, 아버지의 숨결이 있는 고향을 찾는 이들이 많은 시간들이다. 영양에 뿌리를 둔 출향인들의 자부심은 뭘까.   궁벽한 경북내륙지역에서 태어나 경향각지에서 저마다의 노력으로 삶의 뿌리를 내린 출향인들에게 영양은 잊지 못할 노스텔지어이다.   비록 서울처럼 화려한 조명도 없고, 마천루같은 빌딩도 없지만 어린시절 추억을 담은 반딧불이가 희미하지만 생명의 빛을 내뿜고, 고향매미가 가을까지 울어대는 정겨운 곳일 게다.   그것뿐인가. 영양은 문향의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민족시인 조지훈의 영혼이 서려있고, 영원한 낭만시일 오일도가 1백년의 모습으로 여전히 그의 고장에서 출향인들을 맞고 있다.   이문열은 어떠한가. 한국문단의 거장으로 ‘사람의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살아있는 영양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를 움직이는 정치권에도 영양의 뿌리는 공고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지금도 여전히 여야 정치권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 이재오 전 의원 역시 영양출신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경제, 문화계 등 어느 곳이든 영양출신들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넓고 깊다.   이런 출세한 영양인들이 많지만 지금 그들의 고향, 영양의 현실은 날이 갈수록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늙고 병들어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가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는 급감하고 있다. 마치 땅속에서 나온 매미가 벗어버린 허물처럼 그렇게 껍질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이 영양의 현주소다.   풍성한 한가위 추석이지만 그들의 기억속 유년의 푸르름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영양을 살릴 방도를 찾아봐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듯 이제 성공한 자식들이 고향을 돌봐야 한다. 일월산의 정기와 햇살을 받으며 자란덕분에 지금의 영광이 있음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 뉴스투데이
    • 사회
    2019-09-16
  • 〈일월(日月)칼럼〉 영양양조장의 부활을 보며!
    영양양조장 모습   아우 보래. 이사람 한 평생이러쿵 살아도저러쿵 살아도시큰둥 하구나.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렁 저렁그저 살믄 오늘 같이 기계(杞溪)장도 서고, 허연 산뿌리 타고 내려와 아우님도 만나잖는가. 베앙 그렁가 잉 이 사람아. 누군 왜 살아 사는 건가. 그저 살믄 오늘 같은 날지게 목발 받쳐 놓고 어슬어슬한 산비알 바라보며 한잔 술로 소회도 풀잖는가. 그게 다 기막히는 기라. 다 그게 유정한기라.     영양이 낳은 민족시인 조지훈과 함께 청록파시인으로 불리는 시인 박목월(1915~1978)의 ‘기계(杞溪) 장날’ 이란 한편의 주옥같은 시(詩) 전문이다.   박목월의 시 기계장날을 보면 서민들의 일상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해가 뜨면 일을 하고 해가지면 일손을 놓아야 했던 암울했던 농촌지역의 현실. 오일장이 서는 바로 그날 그리운 이들을 만나 모처럼의 회포도 풀고 안부도 묻는 그 시간이 서민들에겐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낙(樂)이었다.   이때 정을 주고받는 통로는 바로 한잔의 술, 걸쭉한 막걸리가 등장함은 당연하다.   요즘처럼 수많은 술이 각양각색으로 나오고, 술집도 천차만별로 이뤄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지만 주전자로 부어마시던 그 막걸리의 힘은 서민들의 삶을 질펀하게 해준 보약같은 존재였다.   이런 막걸리를 국내에서 처음으로 제조한 한국양조의 태동이 바로 경북 영양이라는 것을 아는 이들은 과연 몇이나 될까.   맛있는 술을 만든다는 것은 그만큼 물이 좋아야 한다고 한다. 산 좋고 물 좋은 영양에서 국내 막걸리의 역사가 시작됐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영양양조장’의 역사는 무려 104년. 지난해까지 운영돼 오다 경영난을 견디지 못해 문을 닫으면서 한국막걸리의 역사가 멈춰버렸다.   영양양조장이 다시 새로운 생명으로 호흡하기 시작한 것은 바로 영양군의 노력. 정부의 도시재생사업으로 새롭게 탈바꿈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영양군은 영양읍 동부리 일대  1,438㎡ 부지를 막걸리 제조의 전 과정을 직접 체험할 수 있고 다양한 문화상품을 전시할 수 있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켜 영양지역 경제의 한축으로 만든다는 복안으로 비지땀을 흘리고 있다.   특히 양조장 재생을 위해 교촌F&B(주)와 업무협약을 맺고 생산이 중단된 영양막걸리를 다시 생산하는 등 생산·관광·체험 3마리 토끼를 잡을 수 있는 복합공간으로 조성한다고 하니 기대감이 크다.   문향의 고장 영양이 막걸리의 고장으로도 널리 알려지면 근대문화유산으로서의 위상은 물론 국내외 관광객 유치에도 큰 호재가 될 것이 아닌가. 죽어가는 영양양조장을 되살린 영양군에 박수를 보낸다.   대도시의 화려한 발전을 따라잡을 수는 없지만 우리지역의 천연자원과 오래된 역사유물을 잘 가꾸어 새로운 보석으로 만드는 일은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 수 없다.   바로 영양양조장의 부활이 그러한 ‘보석가꾸기 작업’으로 봐야한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라는 말이 허언(虛言)이 아닌 것이다.   영양양조장이 계획대로 추진돼 일에 지친 우리네 아버지들에게 새로운 힘을 불어넣었던 막걸리의 힘과 서민들의 낭만이 되살아나길 기대한다.
    • 여론마당
    • 칼럼
    2019-07-27

기획특집 검색결과

  • 【기획특집】 영양 ‘주실마을’을 세계적인 유교문화 관광상품으로 재단장하기 위해 뛰는 조석환 박사
    【영양신문=정승화 기자】 유교문화의 본산인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권 최초의 실학마을로 손꼽히는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     김대중 정부시절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와 경북도가 117억원의 예산을 들여 민족문학시인 조지훈 선생의 동상과 시비, 고택 등을 정비하면서 예전에 비해 주실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많이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북내륙 오지에 위치한 지리적 한계와 급변하는 세태속에서 국보급 마을이 그 빛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 이런 주실마을을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유교문화 관광 마을’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출향인사가 있다.   바로 전 성결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낸 조석환 박사(77)가 그 주인공. 현재 경기도 안성시에서 컴퓨터 키보드사업을 하고 있는 조박사는 주실마을 입향조(入鄕調)인 한양조(趙)씨 후손으로 주실마을에 있는 ‘취암고택’의 주인이기도 하다.   경기도와 영양 주실마을을 오가며 빛바랜 주실마을에 ‘새빛’을 불어 넣기 위한 그의 발자취와 향후 계획은 어떤 그림일까.   ▲ 주실마을의 관광자원화를 위한 그의 노력 핏줄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처럼 주실마을에 대한 조박사의 애착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조선중기 당시 영양 주실마을에 사는 한양조(趙)씨들을 가리켜 칼날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가 그에게도 배어있었다.   “지난 2000년 당시 정부가 마을전체를 단장하여 새로운 유교문화권 관광마을로 탈바꿈했지만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마땅한 관광 상품이 없어 제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축제현장을 찾아다니며 많은 벤치마킹을 한 바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빛이 바랬던 주실마을이 중앙정부와 경북도, 영양군의 지원으로 새단장했지만 이를 현대인들과 교감할 수 있는 관광 상품으로 스토리텔링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안타까움으로 발품을 판 끝에 지리산 입구에 소재한 ‘선비문화연구원’과 스페인의 ‘에스펠레트(Espelette)고추축제’, 미국의 농업축제인 ‘미시시피(Mississippi) 페스티벌’ 등 다양한 축제현장을 섭렵하며 주실마을의 관광상품화를 위해 노력해왔다고 그는 자부했다.   실제로 지난 1999년 5월에는 스웨덴, 텐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석학자들을 영양으로 초청해 영양군내 곳곳을 소개하며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성과 관광상품의 호감도를 조사하기도 했다.   ▲ 주실마을 고택과 취암고택 민족문학사의 거목 조지훈 시인을 배출한 주실마을은 1630년경에 마을이 형성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마을모습이 마치 배모양을 띠고 있어 주실(主室), 또는 주곡(主谷)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2개의 종택이 있는데 옥천종택(玉川宗宅)과 호은종택(壺隱宗宅)이다. 옥천종택은 조선 숙종 17년(1671)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와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옥천 (玉川) 조덕린(趙德隣)의 집으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4호로 지정돼 있다.   옆골목 호은종택이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거목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生家)이다. 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항조 조전(趙佺)의 둘째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때 지은 집으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27호이다.   이밖에도 경북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월록서당과 경북 문화자료 제341호인 만곡정사 등 보물급 문화재들이 즐비한 곳이 주실마을이다.   조석환박사는 이 마을 ‘취암고택’의 주인이다. 이집은 1745년 신축돼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난 2006년 조석환박사가 매입해 조부인 취암공(1847~1893)의 호를 따 ‘취암고택’으로 명명하게 됐다고 한다.   “저의 조부인 취암공은 호봉공의 7대손으로 취암유고(翠巖遺稿)를 남길 만큼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부의 학자적 명성에 걸맞게 제가 취암고택으로 이름 짓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여느 고택과 달리 취암고택은 아직 경상북도 문화재 등으로 지정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중앙부처와 경상북도 등에 취암고택에 대해서도 문화재 지정요청을 한 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한 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실마을 전체가 국보급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곳이므로 역사적 관광자원을 활용해 영양군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관광객유치와 학술심포지움 등 주실마을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겠지요” 끝없는 고향사랑에 대한 그의 집념이 실현되길 기대해본다.   ▲ 고향에 대한 애착과 향후 구상중인 관광상품 개발방향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처럼 저도 객지를 떠돌아 다녔지만 한번도 고향 영양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출향인 대부분이 늘 마음한구석에 고향사랑을 품고 있지만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부터 늘 타향살이를 해온 저로서는 더욱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주실마을에 대한 애착과 향수는 일상처럼 저와 붙어있는 그림자 같은 것 일겁니다”   조박사는 지난 1964년도에 영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컴퓨터 키보드분야 전문가인 그는 남과 북이 한글과 조선글을 부르는 차이를 연구하여 새로운 통신기기 단말기인 ‘한겨레 통일 표준글자판을 갖는 단말기’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 각계에 영양출신 유명인사들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영양출신의 흙수저인 조박사도 갖은 고생 끝에 객지에서 성공한 인사로 분류되는 셈이다.   “유교문화유적으로서 주실마을을 관광자원화 하는데 성공한다면 국내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영양고추와 콩을 활용해 수제 영양민속고추장과 된장을 만들 계획입니다. 영양을 브랜드화 하는 이들 상품제조를 통해 영양군민 수익에도 기여하고, 외부 관광객들을 보다 많이 유치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겠지요”   끝없는 고향사랑에 대한 그의 집념이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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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3-21
  • (창간특집) 민족의 한(恨)을 울컥울컥 시(詩)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시인 오일도 시비  【정승화 기자】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의 고향 마을인 영양군 입암면 감천리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마을어귀 연꽃풍경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닝 오일도 동상과 시  △오일도 생가 여름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7월의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시인 오일도 생가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오일도 시인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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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8
  • 〈기획탐방〉영양출신 민족문학사의 거목, 조지훈!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 호은종택     【영양】 정승화 기자=2019년의 봄, 전국적으로 산불이 발생해 온 나라가 화염으로 가득한 듯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가 봄을 맞아 생명의 문을 여는가 싶더니 그 기세가 지나쳐 마침내 불이 되었던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전, 조지훈의 봄은 어땠을까. 그때도 이렇게 불이 났을까. 1920년 일제치하에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 그에게 봄은 처음부터 겨울이었을 것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봄도 빼앗기고 마음도 잃어버린 그 시절의 조지훈. 그의 발자취를 찾아 백두대간의 산간으로 차를 몰았다.   그를 찾아가는 길은 포항에서 영덕 강구를 거쳐 영덕~상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청송IC에서 내려 약 20분간 들어가면 문향의 고장 영양에 도착한다. 세월이 세상을 바꿔놓았다. 이 산간벽지에 고속도로가 다 놓이다니. 동탁(조지훈의 본명)이 살아있었다면 입을 떡 벌렸을 만큼 상전벽해의 세상이 됐다.     영양으로 가는 길   전국 최고의 청정지역인 영양의 대표 농산물이 ‘영양고추’와 ‘영양사과’ 라면 이를 키운 햇살과 청정솔바람이 뛰어난 문필가들을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문향의 고장 영양’ 이라는 영양군 슬로건이 도로표지판으로 등장한걸 보면 그 출발선에는 바로 조지훈이 있을 것으로 무릇 짐작된다.   영양읍내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그의 고향 주실마을. 영양 일원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곳에 5백여년동안 선비의 지조를 지쳐온 주실마을이 고풍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때 환란을 피해 정착한 한양 조씨들의 집성촌으로 1630년경 마을이 형성됐는데 하늘에서 내려다 본 마을모습이 마치 배모양을 띠고 있어 주실(主室), 또는 주곡(主谷)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호은종택 입구 모습   이 마을에는 2개의 종택이 있는데 옥천종택(玉川宗宅)과 호은종택(壺隱宗宅)이다. 옥천종택은 조선 숙종 17년(1671)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와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의 집이다.   옆 골목 호은종택이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生家)이다. 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들어온 입항조 조전(趙佺)의 둘째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때 지은집이라고 소개돼 있다.   당시 호은종택에 사는 조씨를 가리켜 칼날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렸으며, 일제강점기때도 끝까지 창씨계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마을로 지금까지 칭송이 드높다고 한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조상들의 대쪽같은 선비정신, 그 올곧음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때문이 아닐까.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호은종택 마당에 들어서니 따스한 영양의 햇살과 산들바람이 먼저 나그네를 맞는다. 발목아래 서걱거리는 자갈소리. 주인은 없지만 포근한 인심은 남아있는 듯 빈집의 허전함이 없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문화유산이지만 지금도 누군가 방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할 듯 아늑함이 배어있다.      생가에서 바라본 문필봉   그가 앉았을 툇마루에서 앞산을 바라본다. 풍수가들이 집앞 안산에 놓인 봉우리들이 전형적인 ‘문필봉’이여서 조지훈이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붓끝처럼 봉긋 솟은 저 앞산을 바라본다.   산은 그에게 무엇을 보여줬을까. 구름은 그에게 어떤 행로를 보여줬을까. 이 산간오지 마을에서 자란 그가 어떻게 한국문학사의 거장이 되었을까. 일제와 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그는 어떻게 변절하지 않고 순수문학과 민족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을까.   집 뒤로 오래된 감나무가 고목처럼 서있다. 아무래도 그가 어릴때 심었음직한 나무인 듯, 겹 껍질이 세월의 풍상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생명의 소리. 감나무는 주인을 대신해 홀로 생명의 지조를 지키고 서 있는 듯하다   조지훈 문학관    호은종택에서 1백여m 거리에 그의 삶과 문학, 지조의 일생을 담은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입구에서 나그네를 단숨에 잡는 것은 그의 시 승무(僧舞).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근대 대한민국의 대표시 승무가 인사를 한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라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중략)」    이 처절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의 아프도록 순수한 서정과 청아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 자리에 서서 동탁의 그날 밤을 그려보니 답이 나왔다. 바로 이곳, 영양이 그를 빚었다. 하늘아래 첫 동네, 청정한 하늘과 백두대간의 숲에서 나오는 산소바람, 그리고 기름진 땅과 별들의 속삭임.   조지훈의 발자취는 격동의 역사, 그 파도에 맞서온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틈틈이 서구학문을 탐독하던 그는 1939년 약관 19세의 나이에 시인 정지용에 의해 그의 시 「고풍의상」이 “문장”지에 추천되면서 등단하게 됐다.     이후 한국민족시를 대표하는 ‘승무’와 ‘낙화’ ‘ ‘고사’와 같은 명시를 포함, 박목월, 박두진과 활동하면서 엮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앞에서’ ‘여운’ 등 수많은 보석같은 시집을 역사앞에 내놓았다.   시인이자 문학가, 역사학자로서의 삶이 그의 발자취라면 그의 ‘지조론’은 민족과 겨레를 향한 그의 양심이자 생(生)의 지표였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시인 조지훈이 평생을 두고 지켜온 지조적 삶을 엮은 논설집 “지조론”에서 그가 말한 내용이다. 6.25 전쟁후인 1950년대 후반, 자유당 정부시대의 혼탁한 정치환경과 지도자들의 변절을 본 그가 세태를 비판한 송곳같은 글이다.      주실마을 입구전경   격랑의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수한 서정과 민족정신, 대쪽같은 지조를 지켜온 그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가 말했던 시대의 변절자들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인가. 세월은 가고, 강물은 흘렀지만 새로운 변절자들과 시대의 야바위꾼들은 또 어둠속에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어쩔수 없는 세상의 운명인가.   지금 이 시대, 삶이 뿌리채 흔들리는 이 혼탁한 세상에 강력한 순수성으로, 뜨거운 민족정신으로, 한밤에 추는 승무앞에서 용솟음치는 처절한 슬픔처럼 시대의 양심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조지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 기획특집
    • 사람과 인문학
    2019-05-25

우리동네 새소식 검색결과

  • 〈객원칼럼〉주말 영양사용설명서
        2022년(壬寅年) 새해가 밝았지만 3년째 이어오는 코로나19는 우리네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이제는 대면과 비대면의 소통과 양자 간의 균형에 맞춘 새로운 페러다임의 구축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른바 대면과 비대면으로 각자의 소통 역할은 물론 교류하는 인간(homo communicans) 즉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과 희망을 계획하며 신년의 포부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상실감과 정서적 우울감이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소통과 공감이라는 것이 타인과 세상을 보살피는 따뜻한 힘이지만, 과도하게 짊어지게 되면 마음이 지쳐 자기 번아웃(burnout·극도의 정신적 피로나 무기력)이 찾아올 수 있다. 특히, 합리적 결정과 조언이 흔들려 타인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문화가 주는 정서적 안정, 지적소유와 힐링의 포인트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문향의 고장 영양군이 주는 다양한 문화공간은 역사적으로 위엄이 강하며 시대정신이나 문학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맑은 밤하늘의 별빛을 수놓은 아시아 최초 국제 밤하늘 보호공원, 죽파리 자작나무숲길, 선바위 관광지등 자연의 신비로움을 비롯해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 산촌박물관, 조지훈문학관, 오일도 시비공원, 이문열문학관이 조성되고 있어 문향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부족함이 없다.     영양군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시인인 승무의 저자 조지훈(1920~1968)선생의 지훈문학관이 주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주실마을 북쪽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고 그 옆으로는 문필봉(文筆峰)과 연적봉(硯滴峰), 노적봉(露積峰) 등 해발 200m 높이의 봉우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반변천이 흐른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조성된 ‘주실쑤’라는 울창한 숲이 있다.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오늘날까지 가꾸어 온 것으로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 혹은 ‘생명의 아름다운 숲’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필봉은 말 그대로 붓을 닮아 뾰족한 삼각형 모양을 띄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봉우리로 문필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학자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실제로 조동원박사, 조동길교수, 국문학자였던 조지훈교수 등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지훈문학관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소신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의연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청록파시인으로 일반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4.19혁명의 불꽃을 지피고 추상같은 질책으로 지조 있는 삶을 외친 논객이요, 한국의 민족문화사를 재정립한 민속학자라는 사실과 일제 강점기 이후 험난한 역사적 현실아래 선비의 지조와 열정을 지니고 살아온 삶을 통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인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학습의 공간이며, 주실마을과 문학관을 탐방하며 자신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 추천하고 싶다.   지훈시공원은 주실마을의 뒤편에 조성되어 둘레 길처럼 걸으며 시를 읊고 심신의 안정과 한옥들의 고즈넉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인이 된 듯 지훈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빛을 찾아가는 길  - 조 지훈 -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 紫雲(자운) 피어나는 靑銅(청동)의 香爐(향로) 동해 동녘바다에 해 떠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리.      조지훈이 가졌던 선비로서의 품격과 빛을 찾아가는 삶의 발자취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말라는 선대로부터의 대물림된 삼불차(三不借)의 가르침이 아닐까. 삼불차의 정신은 주실마을에 세거를 정한 한양 조씨들의 자존심의 발로이자 근대사의 굴곡을 헤치고 빛을 찾아가는 삶의 지표이다.    인생은 어둠속에도 광명한 빛을 찾아가는 길이기에 새로운 생각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밝히는 힘이 된다. 좁고 어두웠던 삶이 강한 인내 속에 혹독한 추위마저 이겨냈을 때 비로소 따스한 봄 햇살이 우리 곁으로 찾아와 심장에 물든 새싹들을 푸르게 꽃피우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둠속에서도 광명한 빛을 찾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희망해 본다.  (조지훈문학관장/시인 양 희)        
    • 우리동네 새소식
    • 동정
    2022-01-27
  • 【기획특집】 영양 ‘주실마을’을 세계적인 유교문화 관광상품으로 재단장하기 위해 뛰는 조석환 박사
    【영양신문=정승화 기자】 유교문화의 본산인 안동 하회마을과 함께 영남권 최초의 실학마을로 손꼽히는 경북 영양군 주실마을.     김대중 정부시절 유교문화권 관광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정부와 경북도가 117억원의 예산을 들여 민족문학시인 조지훈 선생의 동상과 시비, 고택 등을 정비하면서 예전에 비해 주실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의 발길이 많이 증가했다.   그러나 여전히 경북내륙 오지에 위치한 지리적 한계와 급변하는 세태속에서 국보급 마을이 그 빛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게 현실. 이런 주실마을을 국내는 물론 세계적인 ‘유교문화 관광 마을’로 재탄생시키기 위해 노심초사하는 출향인사가 있다.   바로 전 성결대학교 재단이사장을 지낸 조석환 박사(77)가 그 주인공. 현재 경기도 안성시에서 컴퓨터 키보드사업을 하고 있는 조박사는 주실마을 입향조(入鄕調)인 한양조(趙)씨 후손으로 주실마을에 있는 ‘취암고택’의 주인이기도 하다.   경기도와 영양 주실마을을 오가며 빛바랜 주실마을에 ‘새빛’을 불어 넣기 위한 그의 발자취와 향후 계획은 어떤 그림일까.   ▲ 주실마을의 관광자원화를 위한 그의 노력 핏줄은 속이지 못한다는 말처럼 주실마을에 대한 조박사의 애착과 자부심은 대단했다. 조선중기 당시 영양 주실마을에 사는 한양조(趙)씨들을 가리켜 칼날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렸고 일제강점기에도 끝까지 창씨개명을 하지 않은 지조가 그에게도 배어있었다.   “지난 2000년 당시 정부가 마을전체를 단장하여 새로운 유교문화권 관광마을로 탈바꿈했지만 부가가치를 올릴 수 있는 마땅한 관광 상품이 없어 제가 국내는 물론 세계적으로 명성을 자랑하는 축제현장을 찾아다니며 많은 벤치마킹을 한 바 있습니다”   그의 말처럼 빛이 바랬던 주실마을이 중앙정부와 경북도, 영양군의 지원으로 새단장했지만 이를 현대인들과 교감할 수 있는 관광 상품으로 스토리텔링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는 것이다.   이 같은 안타까움으로 발품을 판 끝에 지리산 입구에 소재한 ‘선비문화연구원’과 스페인의 ‘에스펠레트(Espelette)고추축제’, 미국의 농업축제인 ‘미시시피(Mississippi) 페스티벌’ 등 다양한 축제현장을 섭렵하며 주실마을의 관광상품화를 위해 노력해왔다고 그는 자부했다.   실제로 지난 1999년 5월에는 스웨덴, 텐마크, 핀란드, 노르웨이 등 북유럽 석학자들을 영양으로 초청해 영양군내 곳곳을 소개하며 문화유적으로서의 가치성과 관광상품의 호감도를 조사하기도 했다.   ▲ 주실마을 고택과 취암고택 민족문학사의 거목 조지훈 시인을 배출한 주실마을은 1630년경에 마을이 형성됐다. 하늘에서 내려다 본 마을모습이 마치 배모양을 띠고 있어 주실(主室), 또는 주곡(主谷)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이 마을에는 2개의 종택이 있는데 옥천종택(玉川宗宅)과 호은종택(壺隱宗宅)이다. 옥천종택은 조선 숙종 17년(1671)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와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옥천 (玉川) 조덕린(趙德隣)의 집으로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24호로 지정돼 있다.   옆골목 호은종택이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거목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生家)이다. 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 들어온 입항조 조전(趙佺)의 둘째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때 지은 집으로 경상북도 기념물 제27호이다.   이밖에도 경북 유형문화재 제72호인 월록서당과 경북 문화자료 제341호인 만곡정사 등 보물급 문화재들이 즐비한 곳이 주실마을이다.   조석환박사는 이 마을 ‘취암고택’의 주인이다. 이집은 1745년 신축돼 많은 우여곡절을 거쳐 지난 2006년 조석환박사가 매입해 조부인 취암공(1847~1893)의 호를 따 ‘취암고택’으로 명명하게 됐다고 한다.   “저의 조부인 취암공은 호봉공의 7대손으로 취암유고(翠巖遺稿)를 남길 만큼 당대의 대학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조부의 학자적 명성에 걸맞게 제가 취암고택으로 이름 짓게 된 것이지요”   그러나 여느 고택과 달리 취암고택은 아직 경상북도 문화재 등으로 지정받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중앙부처와 경상북도 등에 취암고택에 대해서도 문화재 지정요청을 한 바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다양한 각도에서 검토한 후 문화재로 지정해 줄 것이라 생각 합니다. 중요한 것은 주실마을 전체가 국보급 문화재적 가치가 있는 곳이므로 역사적 관광자원을 활용해 영양군뿐만 아니라 대내외적으로 관광객유치와 학술심포지움 등 주실마을의 명성을 드높일 수 있는 활동을 하는 것이겠지요” 끝없는 고향사랑에 대한 그의 집념이 실현되길 기대해본다.   ▲ 고향에 대한 애착과 향후 구상중인 관광상품 개발방향   “수구초심(首丘初心)이란 말처럼 저도 객지를 떠돌아 다녔지만 한번도 고향 영양을 잊어본 적이 없습니다. 출향인 대부분이 늘 마음한구석에 고향사랑을 품고 있지만 고등학교 졸업한 이후부터 늘 타향살이를 해온 저로서는 더욱 간절함이 있었습니다. 주실마을에 대한 애착과 향수는 일상처럼 저와 붙어있는 그림자 같은 것 일겁니다”   조박사는 지난 1964년도에 영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연세대학교 대학원 경영학과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한다. 컴퓨터 키보드분야 전문가인 그는 남과 북이 한글과 조선글을 부르는 차이를 연구하여 새로운 통신기기 단말기인 ‘한겨레 통일 표준글자판을 갖는 단말기’를 발명한 것으로 유명하다.   국내 각계에 영양출신 유명인사들이 많은 것을 감안하면 영양출신의 흙수저인 조박사도 갖은 고생 끝에 객지에서 성공한 인사로 분류되는 셈이다.   “유교문화유적으로서 주실마을을 관광자원화 하는데 성공한다면 국내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영양고추와 콩을 활용해 수제 영양민속고추장과 된장을 만들 계획입니다. 영양을 브랜드화 하는 이들 상품제조를 통해 영양군민 수익에도 기여하고, 외부 관광객들을 보다 많이 유치하는 하나의 단초가 되겠지요”   끝없는 고향사랑에 대한 그의 집념이 실현되길 기대해 본다.
    • 기획특집
    • 사람과 인문학
    2021-03-21
  • [발행인 칼럼] 영양신문 창간 1주년에 부쳐!
    이기만 영양신문 발행인/(주)경북미디어 대표이사 이제 다음달이면 영양신문이 창간한지 꼭 1주년이 된다. 지난해 7월 3일 첫 창간호를 발간한지 어제 일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긴 하다싶다.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영양군민들의 성원과 격려덕분에 무사히 안착을 하고 지역신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향인 처럼 격의 없이 대해준 지역민의 덕분임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작은 군단위 영양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지역보다 영양에서 지역신문이 발간돼야 함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에서 지역신문이 없는 유일한 곳이 영양군과 울릉군이고 보니 필자는 우리지역 영양군에 우선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하고 명분 있는 일임을 자각해 오랜 준비 끝에 지난해부터 지역신문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   봄이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이 한올 한올 알토란같은 소식을 물어 집집마다 배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찾아뵙지 못한 가정도 많아 늘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언론인으로서 그것도 지방언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에 더욱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않은 게 현실이다.   당장 손쉬운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면 되는데 구태여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예의와 영양군의 자존심으로 내건 영양신문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비록 영양에 본사를 둔 작은 신문사이지만 어떤 지역신문과 견줘도 정당하고 분명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자칫 유혹에 빠지기 쉬운 금권과 편향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직 영양군민들의 언로(言路)의 역할에 충실한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음을 감히 자부해 본다.   우리지역 영양의 경우 젊은이 보다 어르신들이 많아 인터넷이나 SNS에 익숙치않아 지면신문이 정보습득에 훨씬 효용성이 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북도내 포항이나 구미, 안동 등 도시지역의 경우 젊은 층 인구가 많아 속도성을 자랑하는 인터넷사용을 많이 하고 이를 통해 정보습득을 많이 하지만 농어촌지역의 경우 아직까지 지면신문을 애용하는 실태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영양지역 곳곳을 누비며 신문을 배달하다보면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손을 맞잡아주시고, 고생한다고 음료수도 건네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인정을 영양에서는 흔치않게 볼 수 있는 것도 큰 횡재라 생각한다.   또 영양의 위대함은 바로 문향의 고장이라는데 있다. 민족시인 조지훈과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한국문학의 거목 이문열을 배출한 영양의 힘. 음식디미방으로 잘 알려진 경북의 어머니, 여류문학의 대명사인 장계향 선생의 저 두들언덕에 서면 왜 영양에 신문이 있어야 되는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본지는 지면신문과 인터넷 영양신문 등 이원화 시스템으로 지역뉴스를 공급하고 있는바, 인터넷으로는 매일매일 신속한 정보를 지역민들에게 알려주고, 지면신문은 격주 간으로 모아 집앞까지 배달하고 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보시기 편하도록 활자를 크게 해서 영양군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면도 많은 게 사실이다. 지역언론의 특성으로 군청 소식을 가급적이면 많이 실어서 영양군정을 지역민들에게 잘 홍보하는 역할도 겸용하고 있음을 말씀드린다.   언론이 비판기능에 충실해야 된다지만 먼저 정보전달의 매개체로서 충실히 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영양신문은 실천하고 있다.   오도창 군수님을 비롯한 영양군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이종열 도의원님, 김형민 영양군의회의장님과 의원님들의 성원과 격려에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여론마당
    • 칼럼
    2020-06-04
  •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출처=영양군)   【정승화 기자】영양군문인협회(회장 양희)가 주관하는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가 7월 27일부터 28일까지 자연생태공원에서 개최됐다.   문향골 문학캠프는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고 문학적 소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문학행사로 자유롭게 문학을 논하고 창작하며, 문향의 고장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행사다.   이번 문학캠프는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김선굉 시인의 문학특강과 김경종 선생의 “그리움도 가져가!”, 정중수 교수의 “조지훈과 지조론”등의 문학 강연이 이어졌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또한 별빛이 아름다운 국제밤하늘 보호공원 내 반딧불이 천문대 탐방과 자연생태공원 산책 등 자연 속에서 문학의 소양을 높이는 시간과 문학캠프 체험을 글로 표현하는 백일장을 갖는 등 문학과 자연을 함께하는 일정에 더해 지훈문학관 탐방으로 진행됐다.   양 희 영양문인협회 회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가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가 열의로 문향의 고장을 알리는 문학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문학행사에 대한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 뉴스투데이
    • 문화
    • 종교/학술
    2019-07-26
  • 인터넷 영양신문 창간 인사말씀
    존경하는 영양군민 여러분!사랑하는 경북도민 여러분!  태백준령의 계곡을 따라 동해바다로 가는 길목, 경북의 중심에 자리잡은 영양에서 마침내 뉴미디어시대에 걸맞는인터넷 영양신문이 문을 열었습니다.  역사개창이래 수많은 말(言)과 글(書)이 모이고 흩어져 정처없는 솔바람, 하릴없는 햇살처럼 허무했던 지난날들. 그 인심의 오랜 인내 끝에 마침내 영양군민들의 소리통이 빛을 보게 됐습니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작은 향촌도시 영양이지만, 말과 글은 이 나라를 이끌어온 힘이었습니다.  민족이 바람앞에 촛불처럼 고난을 겪었던 일제치하와 해방정국의 칼날위에서도 영양이 낳은 시인 조지훈은 민족의 지조를 지켰고, 두들언덕에서 일월산을 보며 세상을 가늠했던 소설가 이문열은 지금,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우뚝솟아 있습니다. 경북의 어머니, 여류문학의 대명사인 장계향 선생은 또 어떻습니까. 음식디미방으로 잘 알려진 영양의 두들마을에는 한국 최초의 한글음식조리서 저자인 어머니 장계향의 손맛이 오롯이 배어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말과 글의 역사라고 본다면 영양은 역사의 근본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민족정신과 문학의 뿌리를 찾는다면 바로 ‘승무’의 시인 조지훈과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우뚝 선 이문열이 그 출발점이라 하는데 어느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이 장구한 역사 앞에 선 영양이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말과 글’을 담는 그릇이 없었습니다. 이제 본보 「인터넷 영양신문」이 그 운명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일월산을 타고 내려온 저 청정수처럼 맑고, 빛깔 찬 영양고추를 만들어낸 저 찬란한 햇살 만큼 밝은 소리통이 되겠습니다.   말(言)을 똑바로 할 수 있는 언론이고자 합니다. 글(書)을 바르게 쓰는 정론(正論) 언론이고자 합니다. 잘못된 말과, 비뚤어진 글로 불통이 되어가는 사회를 소통사회로 바꾸고자 합니다.  일월산의 정기를 타고 내려온 저 푸르디푸른 영양의 하늘과 맑은 공기, 쉼 없이 곳곳에 살포시 내려앉는 빛깔 찬 햇살을 이웃들에게 올곧이 홍보하는 전달자가 되겠습니다.  햇살 뒤에 숨은 어둠을 밝히겠습니다.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바윗돌의 방향이 정처 없듯이 이말 저말 혼탁한 언어로 반목과 질시로 갈등을 빚는 지역사회의 역결을 바로잡겠습니다. 영양과 청송, 안동과 예천, 포항과 영덕,  구미와 문경 등 경북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솔바람 같은 청정 언론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영양이 세상과 소통하는 중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내륙의 섬이 아닌 경북의 중심으로, 단절과 고립된 지역이 아닌 연결과 개방의 새로운 출발지가 되도록 바꾸겠습니다.    일월산의 높은 꿈과 산나물의 향취, 따스한 햇살만큼이나 가득한 인심으로 「돈과 사람이 몰리는 영양」이 되도록 인터넷 영양신문이 그 선봉에 서겠습니다. 인터넷 영양신문에 이어 조만간 지면 영양신문으로도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넷 영양신문 발행인/(주)경북미디어 대표이사 이기만 드림  
    • 우리동네 새소식
    • 인사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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