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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양군 수비면 경로잔치 열려!
      【영양】정승화기자=올해로 제15회째 개최되는 수비면 경로잔치가 지난 16일 개최됐다.   영양군 수비면 다목적체육관에서 개최된 경로잔치에는 지역 기관단체장 및 어른신 등 8백여명이 참석, 큰 성황을 이뤘다.   이번 경로잔치는 수비애향회(회장 김상배)주관 아래 체육공원에서 건강체조 댄스팀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수비면 풍물패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여 어르신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수비면 출향인사 및 면민들의 지원으로 보행차, 공기청정기, TV 등 푸짐한 경품을 추첨하여 지급하였고 이에 경로잔치에 참석한 어르신들은 행사를 주관해준 애향회와 수비면에 감사의 뜻을 전해 주위를 더욱 훈훈하게 하였다.   김상배 수비애향회장은 “경로잔치를 통해 지역 발전에 헌신하신 어르신에 대한 감사와 면민 화합의 장을 마련한 것에 만족하며, 앞으로도 어르신들이 흡족해할 수 있는 행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김강규 수비면장은 “이번 경로잔치 준비에 힘쓴 수비 애향회 회원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어르신들의 건강한 노후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 기획특집
    • 스토리 경북인
    2019-05-20

실시간 기획특집 기사

  • [창간특집]「화합영양」, 「경제 재도약」 발판마련!
    영양군청 전경   【정승화 기자】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고향인 영양에서 민선군수로 당선된 오도창 군수의 민선7기 1년은 짧은 시간이었지만 길게 여겨질 만큼 숱한 갈등과 변화무쌍한 한해로 말할 수 있다.   가장 큰 이슈는 지난 6.13 지방선거에서 발생했던 선거법 위반을 둘러싼 상대후보와의 갈등과 현직 공무원인 딸의 재판 등 선거후유증으로 그 아픔속에서도 “변화의 시작! 행복영양”이 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생현장으로 뛰어들어 군민들의 ‘생활밀착형지원’을 체계적으로 지원해온 것이 알찬 성과로 꼽을 수 있다.   여기에 날로 침체돼 가고 있는 지역경제의 재도약을 위해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영양지역 최대의 관광축제인 ‘산나물축제’를 역대 최대규모로 성공적으로 치렀다는 것이 괄목할만한 성과로 인정받고 있다.   지난 1년의 군정성과와 앞으로의 과제에 대해 짚어본다.   오군수의 민선7기 1년의 성과 가운데 첫 번째를 꼽으라면 작지만 알찬생활밀착행정을 말할 수 있다. ‘생활민원바로처리반’과 ‘어르신 목욕비 지원사업’‘마을경로당 부식비 확대지급’등이 대표적인 사례.     주민의 절대다수가 고령인데다 혼자 사는 독거가정도 많아 전기와 수도, 화장실 수리 등 매월 1백건 이상의 민원을 접수해 바로 해결해줌으로써 연세가 많은 어르신들로부터 큰 호응을 얻고 있는 사업들이다.   특히 농촌지역 고령의 어르신들이 이동시 필수품이 되고 있는 전동스쿠터 수리와 노후방충망 교체 서비스 등 실생활에 필요한 고장수리가 지역 어르신들이 가장 많이 찾는 서비스들이 라고 영양군 관계자는 덧붙였다.   오도창 군수는 “군민의 절대다수가 고령의 주민들이므로 크고 거창한 공약사업도 중요하지만 당장 실생활에 필요한 도움을 주는 것이 지역민들에 게는 더 큰 일이라는 생각에 생활민원 바로처리반을 가동하게됐다”며 “군민들의 호응이 높아 점차 확대 시행해나갈 계획”이라고 말했다.   영양이 고향인 오군수가 오랜 공직생활을 마치고 민선군수로서 고향마을을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에게 지역민들은 부모님들이나 마찬가지라는 마음으로 군정에 임하는 것이 피부로 느껴진다.   오군수가 생활민원처리 다음으로 민선첫해에 심혈을 기울인 두 번째 중점행정은 바로 지역 주력산업인 농업의 환경과 체질을 개선한 일이다. “지역 농민들이 땀 흘려 1년 농사짓고도 제값 받고 팔지 못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저는 농작물재배에서 부터 판로에 이르기까지 지역민들이 가장 최적의 환경에서 일할 수 있도록 행정력을 집중했습니다”   그의 농업환경 변화는 일손부족문제 해결. 고령화로 부족한 일손해결을 위해 베트남 화방군과 국제자매결연을 맺고 연인원 3만명에 달하는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이 영양지역 농가에 서 일할 수 있는 근로시스템을 만들었다.   특히 이들 외국인 노동자들이 안심하고 일할 수 있도록 ‘근로자 숙박시설지원사업’과 ‘농작업 대행반’을 운영하는 등 군정차원에서 적극적인 뒷받침을 해 외국인 근로자들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또 전국 최고의 품질로 인정받고 있는 영양고추를 최고가격으로 판매할 수 있도록 판매시스템을 다변화시켰다. 우선 주1회 시행해오던 수매가격 결정을 지난해부터 주2회로 늘려 시장변화에 적극 대응하고, 출하장려금 역시 기존 kg당 1백원 하던 것을 올해부터 2백원으로 인상, 농가소득에 보탬이 되도록 하는 등 변화를 준 것이다.   생활민원과 농업환경변화가 지역농민들을 위한 기본적인 행정지원책이라면 침체된 지역경제의 활로를 모색하기 위한 ‘지역경제재도약 기반마련’과 ‘관광영양’, ‘영양디자인 사업’등은 중장기적인 영양의 재도약을 위한 프로젝트성 사업들이다.   “활력을 잃어가는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제도부터 새롭게 마련했습니다. 여기에 소상인들을 위한 지원과 산나물축제를 지역대표축제로 확대해 시행한 것이 작지만 주효한 땀방울들이라 말할 수 있죠” 오도창 영양군수   오군수는 대표적으로 ‘영양군 전통시장 및 상점가 육성을 위한 조례’, ‘영양군 소상공인 지원에 관한 조례’‘영양군 위생업소 지원에 관한 조례’등 지난 1년 동안 경제도약을 위한 일체의 제도적 기반장치를 말끔히 끝냈다고 말했다.   여기에 15억원 규모의 소상공인 특례보증을 시행해 한달 만에 모두 65개 점포의 소상공인들이 약 10억원의 자금을 신청해 지원하면서 지역 소상공인들의 재정적 부담을 완화시켜준 것도 그의 보람이다.   무엇보다 영양 대표축제인 산나물축제장을 과감하게 전통시장 주변으로 이전해 축제뿐만 아니라 지역상인들에게도 경제적 파급효과가 확산될 수 있도록 조치한 것도 오군수의 확고한 결단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고 군관계자들은 입을 모았다.   오군수가 지난한해 주력한 세 번째 땀방울은 ‘관광영양’으로의 변화이다. 영양이 진정한 관광지로서 외지인들의 발길을 이끌기 위해서 ‘영양다움’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 “우리 영양은 아시아 최고의 밤하늘공원으로 지정될 만큼 청정한 자연을 보존하고 있습니다만 의외로 홍보가 많이 되지 않아 찾는 이가 많지 않았습니다.”   “대표적 문화자원인 음식디미방을 비롯 국내 최초의 막걸리 양조장까지 영양의 정통성을 알리는 문화자원을 적극 되살려 홍보하는 것이 진정한 영양다움을 알리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관광영양과 함께 군 단위 최초로 정부의 ‘도시재생 뉴딜사업’에 선정돼 영양을 새롭게 디자인하고 있는 것도 대표적 성과로 손꼽힌다. ‘공공건축물 그린리모델링 지원사업’과 ‘영양양조장 재건사업’, ‘새뜰마을조성사업’등으로 특히 올해 무창과 상청 2개 마을이 신규로 선정돼 국비 32억원을 확보하는 성과를 올렸다.   이같은 노력으로 오군수는 지난 7월 4일 전국 자치단체장 가운데 최고의 영예인 지방자치대상자로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믿고 따라준 영양군 공무원들과 지역민들의 성원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앞으로 더욱 번영하는 영양이 되도록 최선을 다해 행정력을 펼쳐나가겠습니다.”   초선군수로서 지난 1년을 영양의 초석을 다지기 위한 한해로 보냈다면 앞으로 오군수가 해야될 일은 그야말로 한차원 높은 도약이다. 그 도약의 첫 단계가 바로 영양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현안과제이다.   대표적인 당면현안은 바로 국도31호선 4차선 확포장 공사. 국도임에도 왕복2차선에 불과해 수십년째 지역민들이 애로를 겪고 있는 영양~월전간 국도를 4차선으로 넓히는 것이 그가 해야 될 최우선 과제이다.   여기에 현재 시행중에 있는 LPG 배관망 설치사업과 국립농산물품질관리원 영양사무소 유치, 수비 명품숲 거점권역 육성사업, 영양도서관 신축, 농업유통 혁신시스템 구축 등 영양의 중장기 미래를 위한 프르젝트들이 그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제가 취임한후 영양 역사상 최초로 군 예산이 3천억원을 돌파했습니다. 이는 그만큼 다양한 사업유치를 많이 한다는 점도 있지만 군민과 공직자들이 합심해서 이룬 성과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남은 지역현안 과제들도 협력해서 하나하나 풀어가겠습니다”   항상 겸손한 모습을 잃지 않는 영양의 초선군수 오도창 군수의 당찬 모습에서 영양의 변화된 새로운 내일이 기대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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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2019-08-11
  • (창간특집) 민족의 한(恨)을 울컥울컥 시(詩)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시인 오일도 시비  【정승화 기자】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의 고향 마을인 영양군 입암면 감천리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마을어귀 연꽃풍경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닝 오일도 동상과 시  △오일도 생가 여름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7월의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시인 오일도 생가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오일도 시인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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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8
  • 〈스토리 경북인〉 한국 ‘시조창’의 달인 서상록 가객!
    시조창의 달인 서상록 가객   【기획특집】이기만 기자=한민족의 한(恨)은 어디서 왔을까. 질곡의 역사를 거치면서 고된 삶을 풀어주는 삶의 애환이 있다면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깊은 흥얼거림이 아니었을까.   시대를 거슬러 ‘시조창’으로 잊혀진 역사를 발굴해내는 이가 있다. 시조창의 달인 서상록(53)가객이 그 주인공. 한반도에서 해가 가장 먼저 뜨는 동해안, 경북 포항에서 살아온 삶의 질곡이 그를 옛 시간으로 되돌렸을까.   이제는 고전에서나 볼 시조창을 운명처럼 받아들여 전국대회 대상을 휩쓴 것은 물론 문화체육관광부장관 표창까지 받을 정도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서가객이 시조창과 인연을 맺은 것은 지난 2009년. 평소 동양철학에 관심이 많아 주역공부를 하기 위해 경주 상현서당을 찾은 게 그의 운명을 바꾼 계기가 됐다. 서당을 운영하는 한학자 일암 김주호 선생으로부터 시조창의 길을 안내받은 것이다.   “그 당시만 해도 시조는 알았지만 시조에 운율을 붙여 창을 부르는 것은 잘 몰랐습니다. 그런데 하면할수록 뭔가 끌리듯 빠져들어 지금까지 오게 되었어요.”   서가객의 시조창 공연 모습   서가객은 창을 접한 지 이듬해인 2010년 포항에서 열린 ‘전국시조경창대회’에 첫 출전했으며, 6년째인 지난 2015년 마침내 경주에서 개최된 ‘신라문화제 시조경창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기염을 토했다.    급기야 지난해 4월 시조창의 본고장인 전라남도에서 열린 (사)남도정가진흥회 주최 ‘전국시조경창대회’에서 국회의장상을 수상했으며, 10월에는 경산에서 열린 ‘전국 정가 경창대회’에서 문화체육관광부장관상을 받는 수준에까지 이르게 됐다고 한다.    “저도 어안이 벙벙합니다. 평소 철학관을 운영하다보니 혼자 있는 시간이 많아 매일 꾸준히 연습했을 뿐인데 전국단위 대회에서 대상을 받고 장관상까지 수상하니 실감이 나지 않더라구요.”   서가객에 따르면 시조창의 기원은 신라 향가로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문헌상으로는 조선 영조때 가객 이세춘이 시조에 곡을 붙여 불렀다는 기록이 당시 학자였던 신광수의 자서전 ‘석북집’에 기록돼 있다고 한다.     “시조창은 쉽게 말해 음절의 규칙이라 말할 수 있는 ‘율려’가 정확해야 합니다. 조선시대 선비들이 즐겨 부른 노래이기 때문에 부드럽게 물 흐르듯이 불러야 하죠. 심사위원들이 저에게 대상을 준 것은 ‘절제되고 깔끔한 소리’에 그 특징이 있다”고 평가했습니다.   요즘 유행하는 노래가 랩과 팝 등 빠른 비트와 박자로 표현된다면 ‘시조창’은 답답할 만큼 느림 그 자체이다. 느림의 미학이 있다면 시조창의 장점이라고 서가객은 말한다.    “창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단전에 힘을 줘야하기 때문에 호흡훈련에 큰 도움이 됩니다. 당연히 심폐기능이 좋아지는 것은 물론 정서안정에도 도움이 돼 우울증을 치료한 분도 계십니다. 스트레스에 찌든 현대인들에게 마음수양과 느림을 통해 심신을 치료하는데 ‘딱’입니다”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수상한 모습   현재 포항에서 동양철학관을 운영하며 대한시조협회 포항지부에서 활동하고 있는 그는 전국 지역별 시조창을 통합한 ‘석암 정경태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시조창도 지역 사투리처럼 지방별로 리듬이 다른데 서울경기지역은 담백함이 살아있는 ‘경째’, 충청도는 물이 흐르듯한 리듬의 ‘내포째’, 전라도는 리듬이 화려한 ‘완째’, 경상도는 장중한 힘이 있는 ‘영째’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모든 지역별 시조창 리듬을 하나로 통합한 것이 석암 정경태 선생의 ‘석암째’라고 한다. 서가객이 부르는 시조창이 바로 석암째인 것이다.     “민요가 서민들의 노래였다면 시조는 양반들의 노래라고 볼 수 있어요. 잃어버린 우리 것을 찾아 후대들에게 전수해 주는 것이 저의 사명이라고 생각하고 더욱 열심히 할 생각입니다.”   시조창을 통해 ‘한민족의 얼’을 되살려 내고, 자칫 잃어버릴 뻔 했던 가객의 맥을 잇는 다는 점에서 서가객의 발자취는 ‘인간문화재’이자 미래역사의 길이 되고 있다.
    • 기획특집
    • 스토리 경북인
    2019-06-21
  • 〈스토리 경북인〉과일노점상에서 경북최고의 도매유통상이 된 박종득회장(58)
    박종득 회장   【포항】정승화 기자=삶이 힘들 때마다 우린 거리로 나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살까. 모든이들은 행복한데 나만 불행한 것 같은 생각을 누구든지 한번쯤 하기 마련이다.   그럴 때 보약처럼 힘을 내게 하는 것은 치열한 삶의 현장에서 사투를 벌이는 새벽일터. 바로 농수산물 도매시장이다. 동이 채 트기도 전부터 시작된 그들의 삶은 잠시도 딴생각을 할 수 없는 ‘생(生)의 현장’ 그 자체다.   농어촌 도시인 경북 포항에는 이런 삶의 현장이 2개소가 있다. 바로 어민들의 땀방울과 죽도시장상인들의 삶을 엿볼 수 있는 포항수협 죽도위판장과 사과와 배, 배추 등 각종 과일과 채소를 생업으로 새벽을 여는 사람들이 모이는 경북능금농협 공판장이 있다.   2일 새벽 4시 포항시 북구 흥해읍 동해대로변에 위치한 포항능금농협 공판장의 첫새벽을 여는 박종득회장과 아내 권용희씨(56). 일출도 잠이 든 그 시각, 이들 부부가 먼저 새벽 공판장 가게 문을 연다.   박종득 회장의 삶의 보금자리 경북능금조합 45번 가게 전경   45번 중매인이 그들의 명패. 과일과 함께 해온 30여년의 세월. 이들부부는 이름대신 45번 중매인으로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 돌이켜보면 불과 어제같은 세월이지만 신혼초부터 시작한 과일과의 인연은 이제 그들의 삶이 돼버렸다.   “배운 것없이 먹고살려고 하니 노점상 밖에 없었어요. 포항에 취직하러 왔다가 뜻대로 안돼 트럭으로 시작한 과일노점상이 결국 저의 천직이 됐네요.”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가 고향인 박회장은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집안형편으로 고교졸업후 일터를 찾아 나섰다고 한다. 막노동부터 식당일까지 돈이 되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던 세월이었다. 지금의 부인을 만나고 가장이 되면서 시작한 일이 거리에서 과일을 판매하는 노점상.   꼬맹이 같았던 딸셋 아들 하나 등 4명의 자식들은 벌써 장성해 부모와 함께 가족회사의 일원이 됐다.   박회장이 과일 도,소매업에서 유통회사로 진출한 것은 지난 2007년. 구리시에 주소를 둔 「강원제일유통」과 속초에 있는 「신선농업법인」이 그가 이끄는 유통회사들이다.   박종득 회장의 부인 권용희 사장이 손님들에게 팔 수박을 고르고 있다   그래도 그의 모태는 포항에 있는 경북능금농협 중매인 45번이다. 그곳을 지키는 이는 아내인 권용희씨. ㈜사계절이라는 법인으로 포항과 경주, 영덕, 울진 등 경북동해안지역 농협 하나로마트와 대형식당 등에 과일을 납품하는 형태로 운영하고 있다.   “저는 평생 과일장사를 해오면서 철칙처럼 지켜오는 게 있어요. 바로 고객에 대한 신뢰와 신선한 농산물을 공급하는 겁니다. 물건이 좋지 않으면 언제든지 교환해 드립니다. 농부의 땀방울이 농산물을 만들 듯 신뢰와 성실한 자세가 소비자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의 이같은 성실성에 동참해 함께 길을 걸어가는 직원들만 60여명. 자신이 걸어온 길을 따라오는 자녀들과 직원들을 보면 항상 흐뭇한 마음과 함께 모든 이들이 성공한 장사꾼으로, 사업가로 일어서는 것이 그의 작은 소망이다.   “전반적인 경기침체로 과일장사도 예년 같지 않습니다. 각종 행사나 야유회 등이 많이 열려야 덩달아 과일도 잘 팔리는데 요즘은 그야말로 불경기예요. 그동안 쌓아온 단골손님과 고정거래처를 중심으로 발로 뛰고 있습니다만 어려운 경기의 벽을 넘기가 쉽지 않네요”   요즘처럼 먹고살기 힘든 불경기의 한파가 30년 과일장사를 해온 ‘과일의 달인’ 박회장에게도 버거운 느낌이다. 그만큼 삶이 팍팍해지고 고달파졌다는 얘기일 게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거리의 노점상에서 일약 경북지역 최고의 과일 도매유통회사의 대표로 일어선 박종득회장. 무슨 일이든 한 우물을 꾸준히 팔면 언젠가는 최고가 될 수 있다는 삶의 가치를 그는 보여주고 있다.
    • 기획특집
    • 스토리 경북인
    2019-06-04
  • 〈기획탐방〉영양출신 민족문학사의 거목, 조지훈!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 호은종택     【영양】 정승화 기자=2019년의 봄, 전국적으로 산불이 발생해 온 나라가 화염으로 가득한 듯하다. 겨우내 움츠렸던 대지가 봄을 맞아 생명의 문을 여는가 싶더니 그 기세가 지나쳐 마침내 불이 되었던가.    지금으로부터 반세기전, 조지훈의 봄은 어땠을까. 그때도 이렇게 불이 났을까. 1920년 일제치하에 세상의 문을 열고 나온 그에게 봄은 처음부터 겨울이었을 것이다.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봄도 빼앗기고 마음도 잃어버린 그 시절의 조지훈. 그의 발자취를 찾아 백두대간의 산간으로 차를 몰았다.   그를 찾아가는 길은 포항에서 영덕 강구를 거쳐 영덕~상주간 고속도로를 타고 청송IC에서 내려 약 20분간 들어가면 문향의 고장 영양에 도착한다. 세월이 세상을 바꿔놓았다. 이 산간벽지에 고속도로가 다 놓이다니. 동탁(조지훈의 본명)이 살아있었다면 입을 떡 벌렸을 만큼 상전벽해의 세상이 됐다.     영양으로 가는 길   전국 최고의 청정지역인 영양의 대표 농산물이 ‘영양고추’와 ‘영양사과’ 라면 이를 키운 햇살과 청정솔바람이 뛰어난 문필가들을 배출하는 자양분이 되지 않았을까. ‘문향의 고장 영양’ 이라는 영양군 슬로건이 도로표지판으로 등장한걸 보면 그 출발선에는 바로 조지훈이 있을 것으로 무릇 짐작된다.   영양읍내에서 약 15분 거리에 위치한 그의 고향 주실마을. 영양 일원산자락이 병풍처럼 둘러싼 그곳에 5백여년동안 선비의 지조를 지쳐온 주실마을이 고풍을 드러내고 있다. 이곳은 조선 중기때 환란을 피해 정착한 한양 조씨들의 집성촌으로 1630년경 마을이 형성됐는데 하늘에서 내려다 본 마을모습이 마치 배모양을 띠고 있어 주실(主室), 또는 주곡(主谷)으로 불리게 됐다고 한다.   호은종택 입구 모습   이 마을에는 2개의 종택이 있는데 옥천종택(玉川宗宅)과 호은종택(壺隱宗宅)이다. 옥천종택은 조선 숙종 17년(1671) 문과에 급제, 홍문관 교리와 승정원 우부승지를 지낸 옥천(玉川) 조덕린(趙德隣)의 집이다.   옆 골목 호은종택이 바로 한국 근대문학의 거장 조지훈이 태어난 생가(生家)이다. 이 집은 주실마을에 처음들어온 입항조 조전(趙佺)의 둘째아들 조정형(趙廷珩)이 조선 인조때 지은집이라고 소개돼 있다.   당시 호은종택에 사는 조씨를 가리켜 칼날같은 남인(南人) 집안이라 하여 검남(劍南)이라 불렸으며, 일제강점기때도 끝까지 창씨계명을 하지 않은 지조있는 마을로 지금까지 칭송이 드높다고 한다.  조지훈의 ‘지조론’은 조상들의 대쪽같은 선비정신, 그 올곧음이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때문이 아닐까.      그의 유년시절과 청년기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호은종택 마당에 들어서니 따스한 영양의 햇살과 산들바람이 먼저 나그네를 맞는다. 발목아래 서걱거리는 자갈소리. 주인은 없지만 포근한 인심은 남아있는 듯 빈집의 허전함이 없다. ‘경상북도 기념물 제78호’ 문화유산이지만 지금도 누군가 방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할 듯 아늑함이 배어있다.      생가에서 바라본 문필봉   그가 앉았을 툇마루에서 앞산을 바라본다. 풍수가들이 집앞 안산에 놓인 봉우리들이 전형적인 ‘문필봉’이여서 조지훈이 문학적 재능을 보였다고 말하는 그 자리에서 붓끝처럼 봉긋 솟은 저 앞산을 바라본다.   산은 그에게 무엇을 보여줬을까. 구름은 그에게 어떤 행로를 보여줬을까. 이 산간오지 마을에서 자란 그가 어떻게 한국문학사의 거장이 되었을까. 일제와 독재의 암울한 시대에 그는 어떻게 변절하지 않고 순수문학과 민족의 지조를 지킬 수 있었을까.   집 뒤로 오래된 감나무가 고목처럼 서있다. 아무래도 그가 어릴때 심었음직한 나무인 듯, 겹 껍질이 세월의 풍상처럼 덕지덕지 붙어있다. 말을 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생명의 소리. 감나무는 주인을 대신해 홀로 생명의 지조를 지키고 서 있는 듯하다   조지훈 문학관    호은종택에서 1백여m 거리에 그의 삶과 문학, 지조의 일생을 담은 문학관이 있다. 문학관 입구에서 나그네를 단숨에 잡는 것은 그의 시 승무(僧舞). 학창시절 국어시간에 배웠던 근대 대한민국의 대표시 승무가 인사를 한다.    「얇은 사 하이얀 고깔은 고이 접어서 나빌레라 파라라니 깎은 머리 박사 고깔에 감추오고 두볼에 흐르는 빛이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중략)」    이 처절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의 아프도록 순수한 서정과 청아함은 어디서 왔을까. 그 자리에 서서 동탁의 그날 밤을 그려보니 답이 나왔다. 바로 이곳, 영양이 그를 빚었다. 하늘아래 첫 동네, 청정한 하늘과 백두대간의 숲에서 나오는 산소바람, 그리고 기름진 땅과 별들의 속삭임.   조지훈의 발자취는 격동의 역사, 그 파도에 맞서온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어린 시절 고향마을에서 한학을 공부하며 틈틈이 서구학문을 탐독하던 그는 1939년 약관 19세의 나이에 시인 정지용에 의해 그의 시 「고풍의상」이 “문장”지에 추천되면서 등단하게 됐다.     이후 한국민족시를 대표하는 ‘승무’와 ‘낙화’ ‘ ‘고사’와 같은 명시를 포함, 박목월, 박두진과 활동하면서 엮은 ‘청록집’, ‘풀잎단장’ ‘조지훈시선’ ‘역사앞에서’ ‘여운’ 등 수많은 보석같은 시집을 역사앞에 내놓았다.   시인이자 문학가, 역사학자로서의 삶이 그의 발자취라면 그의 ‘지조론’은 민족과 겨레를 향한 그의 양심이자 생(生)의 지표였다. “지조는 선비의 것이요, 교양인의 것이다. 장사꾼에게 지조를 바라거나 창녀에게 정조를 바란다는 것은 옛날에도 없었던 일이지만 선비와 교양인과 지도자에게 지조가 없다면 그가 인격적으로 창녀와 가릴 바가 무엇이 있겠는가?”   시인 조지훈이 평생을 두고 지켜온 지조적 삶을 엮은 논설집 “지조론”에서 그가 말한 내용이다. 6.25 전쟁후인 1950년대 후반, 자유당 정부시대의 혼탁한 정치환경과 지도자들의 변절을 본 그가 세태를 비판한 송곳같은 글이다.      주실마을 입구전경   격랑의 역경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순수한 서정과 민족정신, 대쪽같은 지조를 지켜온 그의 모습에서 지금 우리는 무엇을 배워야 할까. 그가 말했던 시대의 변절자들이 지금은 완전히 사라지고 없는 것인가. 세월은 가고, 강물은 흘렀지만 새로운 변절자들과 시대의 야바위꾼들은 또 어둠속에서 그들의 세상을 만들고 있는 것은 어쩔수 없는 세상의 운명인가.   지금 이 시대, 삶이 뿌리채 흔들리는 이 혼탁한 세상에 강력한 순수성으로, 뜨거운 민족정신으로, 한밤에 추는 승무앞에서 용솟음치는 처절한 슬픔처럼 시대의 양심으로 우리를 이끌어줄 조지훈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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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람과 인문학
    2019-05-25
  • 영양군 수비면 경로잔치 열려!
      【영양】정승화기자=올해로 제15회째 개최되는 수비면 경로잔치가 지난 16일 개최됐다.   영양군 수비면 다목적체육관에서 개최된 경로잔치에는 지역 기관단체장 및 어른신 등 8백여명이 참석, 큰 성황을 이뤘다.   이번 경로잔치는 수비애향회(회장 김상배)주관 아래 체육공원에서 건강체조 댄스팀의 식전공연을 시작으로 수비면 풍물패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를 마련하여 어르신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또한 수비면 출향인사 및 면민들의 지원으로 보행차, 공기청정기, TV 등 푸짐한 경품을 추첨하여 지급하였고 이에 경로잔치에 참석한 어르신들은 행사를 주관해준 애향회와 수비면에 감사의 뜻을 전해 주위를 더욱 훈훈하게 하였다.   김상배 수비애향회장은 “경로잔치를 통해 지역 발전에 헌신하신 어르신에 대한 감사와 면민 화합의 장을 마련한 것에 만족하며, 앞으로도 어르신들이 흡족해할 수 있는 행사가 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김강규 수비면장은 “이번 경로잔치 준비에 힘쓴 수비 애향회 회원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어르신들의 건강한 노후생활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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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토리 경북인
    2019-0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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