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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입력 : 2020.07.17 1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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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사진(1910년 경 편찬된 사찬 『영양읍지(英陽邑志)』 발견).jpg
1910년 경 개인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영양읍지(英陽邑誌)』가 발견됐다.@영양군제공

 

【이기만 기자】1910년 경 개인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영양읍지(英陽邑誌)』가 발견됐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 이영재 학예연구사가 7월 16일이 영양읍 감천리에 소재하는 국헌종가 (菊軒宗家)의 소장자료를 조사하는 과정에서다.

 

특히 이 자료에는 그간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청기면의 읍지인『청기지(靑杞誌)』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 지방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전망된다.

 

이번에 발견된 읍지는 약 60쪽 가량의 필사본으로 책의 표지에는 표제로 ‘단산지지(丹山地誌)’, 부제로 ‘영양(英陽)’이 기재되어 조선시대 영해도호부(寧海都護府)와 그 속현(屬縣)이었던 영양현(英陽縣)의 읍지임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편찬 내용을 살펴보면 표제와 다르게 본부(本府)인 영해도호부의 속현이자 영양현의 속현이었던 ‘청기면(靑杞面)’으로 시작되어 조선시대 ‘읍지 상송령(邑誌 上送令)’에 따라 편찬된 일반적인 군현의 읍지와 편찬 방법이 다르다.

 

또한 읍지는 ‘청기면’으로부터 시작하여 영양현의 각면(各面)을 차례로 기록한 뒤 영해도호부의 순서에서 제목을 ‘본부지지초(本府地誌抄)’라고 달아 놓음으로써 영해도호부 이후에는 기존에 있는 읍지를 보고 베낀 것임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이 읍지는 당초 청기면의 읍지를 편찬하는 것에서 시작하여 영양현까지 편찬 범위가 확대되었으며, 나아가 본부인 영해도호부의 내용까지 필사하여 추가하게 되면서 결국 『단산지지』라는 표제를 달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910년 이후 사용된 행정명인 ‘청기면’이 사용되었고, 18세기 무렵 읍지의 내용을 주로 담고 있는 점 등으로 볼 때 이 책은 1910년 경 주로 18세기 무렵에 편찬된 문헌을 참고하여 개인적으로 소장하기 위해 편찬했을 가능성이 높다.

 

읍지는 주로 지명과 유적, 그리고 인물을 중심으로 선별 편찬되어 소략한 관찬 읍지의 내용을 상당부분 보완하고 있으며, 특히 소재가 파악되지 않은 청기현(靑杞縣)의 읍지인 『청기지(靑杞誌)』를 참고한 것으로 추정되어 지방사 연구에 큰 기여를 할 것으로 기대된다.

 

문화시설사업소장 우제학은 “이번 사찬 읍지의 발견으로 관찬 읍지와 다양한 측면에서 자료를 상호 검토 및 보완할 수 있기에 지방사 연구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마련된 것이라고 평가하며 앞으로도 박물관의 조사 및 연구 활동에 많은 협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2-3. 사진(1910년 경 편찬된 사찬 『영양읍지(英陽邑志)』 발견).jpg
1910년 경 개인에 편찬된 것으로 추정되는『영양읍지(英陽邑誌)』가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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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경 편찬된 사찬 『영양읍지(英陽邑志)』 발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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