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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11회 오일도 전국백일장, ‘민족의 한을 울컥울컥 시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민족의 한을 울컥울컥 시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를 기리는 전국백일장이 올해도 개최된다. 9월24일 오전10시 시인 오일도의 고향마을인 경북 영양읍 감천리에 소재한‘오일도 시공원’에서 영양문인협회(회장. 오용순) 주최로 열한번째 백일장이 열린다.   초등부와 중등부, 고등부, 대학·일반부 대상으로 한 백일장과 아울러‘문학, 교감의 능력과 따뜻한 상상력’주제로 영남대 국문과 김문주 교수의 문학특강, 청소년들의 시낭송과 장기자랑을 볼 수 있는 청소년문화제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이 진행될 예정이다. 이즈음에서 오일도의 생애를 보자. 영양이 낳은 불세출의 낭만시인 오일도 그는 누구일까. ------------------------------- 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오일도 생가   가을햇살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아직 여름을 잊지못한 늦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 뉴스투데이
    • 문화
    2022-09-22
  • 소설가 이문열 ‘광산문학연구소’ 화재로 전소
      영양군 석보면 원리2리 두들마을에 소재한 소설가 이문열씨 소유의 한옥건물 ‘광산문학연구소’에 화재가 발생해 건물2개동이 전소됐다.   다행히 거주자는 없어 인명피해는 발생하지 않았으나 전기합선이나 방화 등 화재원인에 대해 경찰과 소방당국이 정밀조사에 나섰다.   영양군과 경북도소방본부 등에 따르면 화재는 지난 6월30일 밤 11시10분께 발생했다. 갑작스레 불길이 치솟는 것을 보고 이 마을 주민이 119에 신고함으로써 알려졌다.     화재가 발생하자 영양소방서 등 관계기관이 출동해 다음날인 7월1일 오전6시까지 진화를 완료했으나 목조형 기와건물이여서 2개 동(418 ㎡)이 완전 전소돼 잿더미로 변했다.        경찰은 최초 건물 관리사 식당에서 불이 난 것으로 보인다는 목격자의 전언에 따라 전기합선 등에 의한 화재이거나 방화일 가능성도 배제하지 않고 소방당국과 함께 정밀 조사에 착수했다.   한편 문향의 고장 영양을 대표하는 현존 소설가 이문열씨의 ‘광산문학연구소’는 작가의 집필실과 각종 세미나 및 학술토론회가 열리는 문화의 장으로 지난 2001년 5월 군비 등 8억9천여만원을 투입해 건립한 전통 목조한옥건물이다.
    • 뉴스투데이
    • 사회
    • 법원/검찰/경찰
    2022-07-03
  • 영양군 민선8기 제50대 오도창군수 시대 개막!
      무려 81.5%%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6.1지방선거에서 경북최다득표로 재선에 성공한 오도창 영양군수가 마침내 1일 취임식을 갖고 민선8기 시대를 힘차게 열었다.   초선 4년에 이어 힘있는 재선군수인 제50대 영양군수에 당선된 오도창 군수는 이날 취임사에서 향후 4년을 “바른길, 넓은길, 다른길로 걸어가겠다”며 영양군의 혁신적 발전을 이끌 것을 강조했다.   특히 선거기간중 약속했던 예산 5천억 달성, 고추생산 1위, 농가소득 6천만원 달성이라는 소위 ‘5·1·6 프로젝트’ 실현을 통해 모두가 부러워하는 눈부신 영양 발전을 반드시 이루어 내겠다.”고 포부를 밝혔다.   이날 오전 11시 영양군민회관에서 개최된 취임식에는 가족친지들과 군민, 공직자 등 약 1천여명의 축하객들이 운집해 큰 성황을 이뤘다.     어린 화동들의 축하 꽃다발로 시작된 이날 취임식에서 단상에 오른 오군수는 감격에 벅찬 듯 지난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재선군수로 당선시켜준 군민들에게 감사를 전하고, 앞으로 나아갈 미래영양에 대해 소신을 펼쳐 박수갈채를 받았다.   취임사에 앞서 전날밤 발생한 이문열 소설가의 ‘광산문학연구소’ 화재를 언급, 안타까움을 전하는 등 자신감있는 재선군수로서의 결기와 군민들에대한 따뜻한 사랑을 느끼게 해줬다는 평가를 받았다.   영양군 청기면 토곡리 출신으로 지난 1980년부터 직업공무원의 길을 걸어온 오군수는 영양부군수로 재직중 4년전 지방선거에서 출마해 첫 당선된후 이번 선거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제49대 영양군수로 재임 시 국도31호선 선형개량사업, LPG배관망보급사업, 영양 자작나무 숲 관광자원화 등의 성과를 올렸으며, 이번 선거를 통해 영양발전을 위한 적임자라는 군민들의 신임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오도창 군수는“선거 때 약속했던 공약들을 알뜰살뜰히 챙겨 군민들이 변화를 체감할 수 있도록 하겠다. 5·1·6 비전을 반드시 달성해 자랑스러운 영양, 희망찬 영양을 만들겠다.”고 약속했다.        
    • 뉴스투데이
    • 정치
    2022-07-03
  • 【영양군수 출마예정자 릴레이 인터뷰】
    “군민여러분, 3년 6개월 영양도약의 준비를 마쳤습니다. ‘더 변화와 더 행복’한 미래, 영양의 새로운 역사를 쓰겠습니다!”      오는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가슴 뜨거운 남자가 있다면 오도창군수를 빼놓을 수 없다. 지난 2018년 당선이후 지금까지 영양군을 이끈 성적표가 선거일 나오기 때문이다. 초선군수로서 선거일까지 약 4년간의 시간들을 1만7천여명의 군민들은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오군수가 합격점을 받는다면 재선에 성공할 것이고, 낙선의 고배를 마신다면 군민들의 평가가 낙제점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TK 지역의 특성상 야당인 ‘국민의힘’ 공천이 주효하지만 이 또한 오군수의 군정성과와 리더십에 대한 영양군민들의 바닥정서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과연 오도창 군수는 어떤 성적표를 받을 것이며, 그의 재선도전기는 성공적으로 이뤄질 것인가.      퇴근 무렵인 오후5시 오도창군수 인텨뷰를 위해 군수실을 찾았다. 영양군청 2층에 위치한 그의 집무실은 오군수의 성정을 닮은 듯 검소하고 단아했다. 테이블위에는 지난 3년6개월간 영양군의 변화상과 오군수가 흘린 땀방울의 성과물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기다리고 있다. 말없이 행동으로 보여주는 오군수의 실천리더십을 오롯이 보여주는 듯 했다.     ▲지난 2018년 선거이후 벌써 3년6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동안 군정운영의 소회와 향후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먼저 코로나19 등으로 어려운 시간 속에서도 묵묵히 인내하시며 생업을 위해 오늘도 땀방울을 흘리시는 군민 여러분께 이 기회를 빌어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시고 모든 군민의 가정에 만복이 가득하시길 기원드립니다.    더불어 저와 함께 민선7기 영양의 ‘변화’와 군민들의 ‘행복’을 위해 불철주야 뛰어준 5백여 공직자 여러분께 특별히 감사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군민여러분의 성원으로 고향군수에 당선된 것이 얹그제 같은데 벌써 3년6개월의 시간이 흘렀습니다.    어려운 여건에서도 우리 영양을 변화시키고, 군민들의 삶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해온 알찬시간들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시대적 어려움과 힘든 여건 속에서도 우리 영양이 많은 변화를 한 시간들이었습니다. 아직 만족스럽지는 못하지만 영양군이 미래를 향해 도약할 만반의 채비를 갖췄다고 감히 자부합니다. 군민여러분의 성원과 지지가 있다면 이제는 한층 높이 도약하는 영양군으로 발돋움시키는데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 초선군수지만 재선· 3선 못지않은 많은 일을 한 것으로 평가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어떤 ‘변화’를 일으켰는지요.    역사적으로 볼 때 영양군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봉착해 있다고 봅니다. 한때 2만여명에 육박하던 인구가 저출산·노령화 등으로 자꾸 줄어들고 있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죠. 대표적인 인구소멸시군으로 손꼽힐 정도니까요.    전국 대다수 농어촌지역의 공통된 현상이지만 이런 시대적환경속에서 군수에 당선된 제가 할 일은 분명했습니다. 스러져가는 영양군을 다시 되살려야 할 임무죠. 어떻게 하면 우리 영양군을 ‘젊고 활기찬 영양’, ‘살기 좋은 부자영양’으로 만들 것인가 하는 것이죠. 그래서 저는 ‘변화’를 선택했습니다.    살기위한 몸부림이죠. 영양군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 새롭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모든 군정시스템을 바꿔야한다는 것을 절실히 느꼈습니다. 영양군의 생활공간, 즉 환경인프라를 현대식으로 탈바꿈시키고,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모든 역량을 쏟았습니다.    비행기가 이륙하기위해서는 양쪽 날개가 있어야 하듯이 군의 시스템 변화와 군민들의 생활상변화를 통해 이제 소멸 대상 시군이 아닌 다시 일어서는 ‘부자영양’으로 비상(飛上)할 준비를 완료했다고 자부합니다.     ▲ 재임중 추진한 업무가운데 가장 괄목할 만한 성과가 있다면 어떤 사업을 꼽을 수 있는가요   군수로서 당연히 해야 될 일이지만 돌이켜보면 군민들과 함께 가장 기뻤던 일이 바로 ‘국도 31호선 선형개량사업’이 예비타당성조사를 통과한 일입니다. 육지속의 섬으로 불릴 만큼 교통오지였던 영양의 관문이 이제 활짝 열리게 된 것입니다.    매우 역사적인 일로서 그 오래된 숙원사업해결에 제가 중심에 있었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또 취임이후 예산 3천억원 시대를 열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국·도비를 유치했다는 증거죠. 재정이 열악한 농어촌시군 자치단체에서 국·도비 확보야말로 민선단체장의 역량이라고 간주할 만큼 어쩌면 군정운영의 모든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돈이 있어야 지역발전사업과 주민복지사업을 할수 있으니까요. 그런 점에서 제가 40여년이상 행정에 몸담았던 경험과 함께 뛰어준 공직자들의 땀방울이 큰 도움이 됐습니다. 예컨대 지난 2019년 2800억원이던 예산을 취임 1년뒤인 2020년부터 3,010억원으로 증액시켰습니다. 국도비 813억원을 유치한 덕분이죠.    다음해인 2021년에는 3,141억원(국도비 921억원), 올해는 3,456억원(국도비 1,014억원)까지 예산이 확대됐습니다. 예산확보로 농촌마을 생활개선사업인 ‘새뜰마을사업’과 도시재생뉴딜사업, LPG배관망구축사업 등 굵직굵직한 인프라개선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습니다.   생활인프라 개선사업으로 당장 지역민들이 경제적 혜택을 체감하고 있는데요. LPG배관망구축사업의 경우 영양읍 일원 8개리 2,310세대에서 난방비가 40% 정도 절감되고 있어요.    또 신재생에너지 융복합사업을 실시한 1200세대의 경우에도 월 5~6만원 나오던 전기세가 1만원 정도로 줄었어요. 이런 사례가 바로 지역인프라변화를 통한 군민들의 삶을 질을 향상시키는 단적인 사례로 볼 수 있죠. 군민들이 편리하고 살림살이가 나아지는 선순환적인 변화가 영양군 곳곳에서 현실화되고 있어 큰 보람을 느낍니다.   ▲ 영양은 ‘고추특산물’ 고장으로 알려질 정도로 농업의 비중이 큰 고장입니다. 외국인 계절근로자 수급문제 등 많은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동안 어떤 노력을 했으며 성과가 있었는지요.   영양지역의 주력사업이 농업이기 때문에 저는 취임이후 줄곧 농업생산기반구축과 농가소득증대에 주력했습니다. 평소에도 자주 농가를 방문하다보니 ‘농사군수’라는 별명도 얻었습니다. 가장 현안은 일손부족이죠.    그동안 베트남지역 외국인 계절근로자들의 원활한 수급으로 큰 문제가 없었는데 코로나19로 2년 전부터 큰 애로를 겪었습니다. 올해는 계절근로자 도입국가를 확대해 수급에 차질이 없도록 할 계획입니다.    농업분야에 있어 가장 큰 보람은 농작물재해보험료 자부담을 기존 20%에서 10%로 경감시킨 겁니다. 실제 지난해의 경우 지역농가에서 127억원의 재해보험을 받아 재해에 따른 손실보상에 큰 역할을 했어요. 또 지역농가소득을 위해 특산물인 홍고추 수매가를 전국 최고가로 수매하고, 출하장려금도 기존 100원에서 200원으로 인상했습니다.    이런 노력으로 지역농가소득이 향상되는 결과로 이어지는 것이죠. 예컨대 지난해 기준 전국평균농가소득이 4503만원인데 우리 영양군은 5천만원을 달성했습니다.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올해부터 안정적인 소득창출을 위해 ‘엽채류특구조성’, ‘노지배추 농작물재해보험가입’, ‘과실전문생산단지조성’ 등 농업의 첨단화·규모화 시책을 추진할 계획에 있습니다.    내년부터 시행예정인 연간 60만원의 농민수당이 현실화 되면 지역농가의 경쟁력은 한층 강화될것으로 봅니다.     ▲ 영양군의 가장 큰 당면현안중의 하나가 인구감소입니다. 인구유입을 위한 그간의 노력과 성과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정확한 지적입니다. 그동안 영양군의 시스템변화와 삶의질을 향상시키려는 모든 노력의 근본이유가 바로 ‘인구유입’에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돈과 사람’이 몰리는 영양이 바로 제가 추구하는 영양의 변화상입니다.    그동안 인구감소를 저지하기위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다양한 귀농인 정착지원사업과 전입축하금지원, 주소이전 유공장려금 지원, 청년일자리 지원사업, 출산장려금 지원 등을 펼쳤으나 인구자연감소를 막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인구 2만명회복을 위한 새로운 도전은 계속이어져야 겠지요. 어느 한분야가 아닌 종합적인 ‘부자영양’ 정책이 성공하면 결국 인구증가도 가능하리라 봐요. 지역경제활성화 시책을 대표적인 사례로 들수 있습니다.    영양사랑카드를 활성화하고, 소상공인 특례보증과 이차보전지원도 늘릴 계획입니다. 공공일자리 확대와 영양전통시장 시설현대화 등도 긍정적인 작용을 할것으로 봅니다. 현재 인구역외유출을 막고 부족한 주택문제해결을 위해 44가구규모의 행복주택건립을 추진중에 있습니다. 이밖에 체류형 귀농체험마을과 별빛정원조성, 산촌문화누림센터 등 다양한 귀촌시책이 추진될 예정입니다.     ▲ 영양군에서 지역 어르신 가정을 위해 추진하고 있는 ‘생활민원바로처리반’에 대한 호평이 많습니다. 어떤 업무를 추진하며 성과가 있었는지요.   옛말에 ‘굽은 나무 선산 지킨다’는 말이 있잖습니까. 아무리 자식들이 훌륭해도 곁에 있는 자식이 부모에게는 진짜 효자인 것처럼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에게는 사소한 일이 생겨도 돌봐줄 사람이 필요합니다.    그런점에서 저는 취임이후부터 곧바로 ‘생활민원바로처리반’을 운영했는데요. 성과가 좋습니다. 지난 2019년에는 1,108건, 2020년에는 1,545건, 지난해에는 2,317건의 민원을 해결했죠. 수도고장이나 지붕수리, 전기고장 등 일상생활에서 벌어지는 사소한 일들이 대부분이지만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에게는 큰일들이죠.    언제 어디서든 이런 민원이 발생하면 처리반원들이 곧바로 뛰어갑니다. 자녀들이 대부분 객지에 나가 있는 어르신 가정에 영양군 처리반원들이 그 역할을 대신하는 거죠. 저는 이런 것을 ‘효자리더십’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식처럼 지역 어르신들을 보살피는 리더십이 바로 효자리더십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궁극적으로 영양군이 ‘부자영양’으로 거듭 나기위해서는 천혜의 관광자원을 통해 많은 관광객을 유치하는 등의 전략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관광정책과 미래전략이 있다면 말씀해 주세요   코로나19로 중단됐으나 영양산나물축제와 고추축제는 대내외적으로 잘 알려진 영양군의 대표적인 축제입니다. 실제 영양산나물축제의 경우 역대 최대인원인 16만명이 방문할 정도였으니까요.    향후 온오프라인을 통한 축제활성화는 물론 영양의 천연자원인 영양자작나무숲, 선바위관광지, 영양서식지, 최시형 은거지 복원, 장계향 문화체험교육, 이문열 문학관 건립, 별천지 캠핑장 조성 등을 통해 명실공히 ‘천연관광도시’로 발돋움 시킬 계획입니다.   여기에 ‘미래전략사업’으로 3가지의 중점사업을 추진할 구상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지난 1969년 대한뉴스에도 나올 만큼 큰 화제가 됐던 「구리(Cu)광산」을 개발할 야심찬 계획을 세워두고 있습니다. 세계적으로도 구리(Cu) 소재에 대한 가치가 높은 만큼 광산이 개발될 경우 경제적 파급효과는 상당할것입니다.    또 수익사업으로 전기를 생산할수 있는 「양수발전소」 건립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친환경 양수발전소와 구리광산이 개발될 경우 지방소멸위기를 막고 영양군을 내륙의 작은 군이 아닌 경북의 중심지역으로 거듭날 수 있는 신성장동력원이 될것입니다. 여기에 인근 청송에 소재한 교정시설의 과밀화로 코로나19 집단감염이 우려되는 만큼 영양군이 이를 대신할 수 있는 교정시설 건립방안도 검토하고 있습니다.        ▲ 끝으로 오는 6월1일 재선도전에 임하는 각오와 포부에 대해 말씀해 주세요   그동안 저에게 뜨거운 성원과 지지를 보내주신 민여러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군민여러분의 도움으로 저는 민선7기 기초단체장 공약실천계획평가 A등급(우수)선정, 2021 매니페스토 우수상을 받는 등 대외적으로 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군민여러분이 계셨기에 가능했습니다.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군민여러분! 저는 이제 영양군의 ‘변화’와 군민들의 ‘행복’을 위해 뛰어온 그동안의 노력을 바탕으로 한층 발전된 영양군의 새로운 ‘도약’을 위해 오는 6월1일 제8대 민선군수 선거에 도전할 것을 공식적으로 천명합니다.    지난 4년간의 소중한 군정 경험을 살려 ‘군민을 더 편하게, 더 잘살게, 더 행복하게’ 만드는게 저의 모든 것을 바칠 각오입니다.   무엇보다 저는 ‘국민의힘’ 당원으로서 이번 6.1 지방선거에 임하고자 합니다. 뼛속까지 국민의힘 당원으로서 당이 어떠한 방식으로 제8대 영양군수 후보공천자를 선정하든 오직 ‘국민의힘’ 후보로서 군민의 심판을 받겠습니다. 공정한 경쟁과정을 거쳐 결과에 승복하는 깨끗하고 아름다운 선거문화 조성에 앞장서겠습니다.    군민여러분의 뜨거운 지지와 성원을 당부드리며, 남은 시간까지 오직 영양군과 군민여러분을 위해 최선의 노력으로 영양군정에 임할 것을 말씀드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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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1-27
  • 영양문인협회, 2021년도 ‘영양문학’ 37호 발간
      문향의 고장, 영양의 자존심,  ‘영양문학’ 37호가 발간됐다. 올해로 37년째, 지난 1985년 창간호가 나온 이래 햇수만큼이나 37년의 연륜을 지닌 문학잡지다.   지방문단에서 이만큼 오랜 연륜을 지난 문학지를 찾아보기 힘들만큼 ‘영양문학’은 이름만으로도 국내 문단에서 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사단법인 한국문인협회 영양지부, 즉 영양문인협회(회장·오용순)가 ‘영양문학’의 주체다. 회원은 모두 60여명. 인구 1만6천여명의 전국 최소단위 자치단체에서 이끌어가는 문단이지만 회원수는 웬만한 시단위 못지 않은 규모를 자랑하고 있다.     시인이자 영양문인협회를 이끌고 있는 오용순 회장은 “영양은 민족문학의 거목인 조지훈 선생을 비롯 오일도 시인과 현존하는 한국문단의 보배인 이문열 작가를 배출한 자타가 인정하는 문향의 고장”이라며 “국내 각 분야에서 활동하는 문인들과 지역문인 등 다양한 회원들이 왕성한 작품활동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37회째 발간된 2021년도 ‘영양문학’은 기획특집으로 영양군 청기면 출신의 김선굉 문학평론가(대구시인협회장)의 「영양문학의 원류를 찾아서 3」 란 주제의 평론과 유명시인들의 초대시, 영양을 사랑하는 문인들의 시작품 등으로 구성됐다. 여기에 회원들의 투고작품과 올해 개최된 ‘오일도 전국 백일장’ 당선작들이 실렸다.   한편 영양문인협회에서는 2022년도 신입회원모집과 새해 발간될 ‘영양문학’ 제38호에 게재할 원고를 접수한다고 밝혔다.   모집분야는 시, 시조, 동시, 수필, 단편소설, 평론, 기행문 등이며, 경북 영양군 영양읍 군민회관길 7 영양문화원 4층소재 영양문인협회로 보내거나 이메일(yjo00362hanmail.net)로 보내면 된다. 연락처는 054, 683-0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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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12-18
  • [ 사설 ] 여름 피서, 영양으로 초대합니다
    코로나 시대 여름 피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코로나 청정지역인 영양을 추천한다.   산발적으로 확진자가 발생했지만 한자리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대부분 외지에 주소를 둔 이들의 감염이었다.   경북지역 타 시군에 비해서도 영양군은 코로나 청정지역이다.   이런 영양군이 바로 코로나 시대 멋진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어린시절 추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양국제밤하늘보호공원’은 최고의 여름선물이 될 수 있다.   아시아에서도 가장 맑은 별을 볼수 있는 이곳에 오면 반딧불이 천문대에서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찾을 수 있다.   피로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밤하늘보호공원은 그야말로 순백색의 자연을 오롯이 체험할수 있는 가족무대가 될 것이다.   뿐만인가. ‘문향의 고장 영양’ 이란 슬로건이 말해주듯 ‘승무’의 시인 조지훈생가와 현존 문학계의 거목 이문열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학을 사랑하고 자연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관광코스가 어디 있겠는가.   수비면에 위치한 죽파리 자작나무숲도 알려지지 않은 보석이다.   하얀자작나무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폐부깊숙이 찌든 스트레스와 삶의 찌꺼기들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신선함을 맛볼수 있을 것이다.   물놀이 장소도 즐비하다. 수하계곡과 선바위관광지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여름 휴식처로 유명하다.   국립검마산자연휴양림은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은 찾는 곳이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과 청송·봉화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을 걷다보면 여름더위와 코로나 걱정에서 해방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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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2021-07-21
  • 【시론】 영양출신 인재는 많은데...
    추석이다. 어머니의 땅, 아버지의 숨결이 있는 고향을 찾는 이들이 많은 시간들이다. 영양에 뿌리를 둔 출향인들의 자부심은 뭘까.   궁벽한 경북내륙지역에서 태어나 경향각지에서 저마다의 노력으로 삶의 뿌리를 내린 출향인들에게 영양은 잊지 못할 노스텔지어이다.   비록 서울처럼 화려한 조명도 없고, 마천루같은 빌딩도 없지만 어린시절 추억을 담은 반딧불이가 희미하지만 생명의 빛을 내뿜고, 고향매미가 가을까지 울어대는 정겨운 곳일 게다.   그것뿐인가. 영양은 문향의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민족시인 조지훈의 영혼이 서려있고, 영원한 낭만시일 오일도가 1백년의 모습으로 여전히 그의 고장에서 출향인들을 맞고 있다.   이문열은 어떠한가. 한국문단의 거장으로 ‘사람의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살아있는 영양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를 움직이는 정치권에도 영양의 뿌리는 공고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지금도 여전히 여야 정치권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 이재오 전 의원 역시 영양출신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경제, 문화계 등 어느 곳이든 영양출신들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넓고 깊다.   이런 출세한 영양인들이 많지만 지금 그들의 고향, 영양의 현실은 날이 갈수록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늙고 병들어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가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는 급감하고 있다. 마치 땅속에서 나온 매미가 벗어버린 허물처럼 그렇게 껍질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이 영양의 현주소다.   풍성한 한가위 추석이지만 그들의 기억속 유년의 푸르름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영양을 살릴 방도를 찾아봐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듯 이제 성공한 자식들이 고향을 돌봐야 한다. 일월산의 정기와 햇살을 받으며 자란덕분에 지금의 영광이 있음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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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9-16
  • (창간특집) 민족의 한(恨)을 울컥울컥 시(詩)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시인 오일도 시비  【정승화 기자】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의 고향 마을인 영양군 입암면 감천리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마을어귀 연꽃풍경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닝 오일도 동상과 시  △오일도 생가 여름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7월의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시인 오일도 생가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오일도 시인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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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8
  •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출처=영양군)   【정승화 기자】영양군문인협회(회장 양희)가 주관하는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가 7월 27일부터 28일까지 자연생태공원에서 개최됐다.   문향골 문학캠프는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고 문학적 소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문학행사로 자유롭게 문학을 논하고 창작하며, 문향의 고장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행사다.   이번 문학캠프는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김선굉 시인의 문학특강과 김경종 선생의 “그리움도 가져가!”, 정중수 교수의 “조지훈과 지조론”등의 문학 강연이 이어졌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또한 별빛이 아름다운 국제밤하늘 보호공원 내 반딧불이 천문대 탐방과 자연생태공원 산책 등 자연 속에서 문학의 소양을 높이는 시간과 문학캠프 체험을 글로 표현하는 백일장을 갖는 등 문학과 자연을 함께하는 일정에 더해 지훈문학관 탐방으로 진행됐다.   양 희 영양문인협회 회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가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가 열의로 문향의 고장을 알리는 문학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문학행사에 대한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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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7-26
  • 〈세상돋보기〉황교안이 찾아간 보수의 귀곡자(鬼谷子) 이문열!
    소설가 이문열   【영양】정승화 기자=보수의 중심, 제1야당의 대표인 황교안 대표가 ‘보수의 방향’을 모색하기 위해 8일 경기 이천에 위치한 문학사숙 부악문원에서 소설가 이문열 작가를 만났다. 차한잔의 만남이지만 두사람의 만남은 세간의 급 관심을 불러일으키며 눈길을 모았다.   그도 그럴것이 이문열이 누구인가. 한국문단의 붙박이 거목이 된지는 오래이고 보수의 가치와 혁신을 주창해온 소위 ‘보수론’의 이론가, 현대판 귀곡자(鬼谷子)로 볼 수 있지 않은가.   지금 이시대, 이문열의 모습에서 중국 춘추시대 사상가로 귀곡지방에서 은신하며 세상을 경영하는 책략을 펼쳤던 뛰어난 지략가 귀곡자의 모습이 겹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런 이문열 작가를 보수정치의 새로운 선장인 황교안 대표가 만났다는 건 격랑의 파도위를 오가며 생사를 장담할수 없는 보수정당과 보수정치인들에게는 ‘한줄기 빛’과 같은 희망의 길을 알려줄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의 행로를 보면 이문열작가와 황교안 대표간의 ‘만남’, 그리고 그들이 함께 공유한 유리상자속의 ‘보물지도’의 답은 당연히 「보수의 혁신」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문열 작가는 오래전부터 ‘보수가 죽어야 보수가 산다’는 내용의 소위 보수의 혁신적 가치에 대해 말해왔으며, 실제 보수정당인 자유한국당에서 이작가에게 기댄적도 많다.   지난 2004년 제17대 총선당시 자유한국당의 전신 한나라당 공천심사위원으로 위촉된 사례가 이를 뒷받침해준다. 황교안 대표 역시 보수정치, 보수정당의 길을 찾기 위해 사방을 헤메고 다닌다.   이문열의 뿌리, 영양 두들언덕   지난 6일 당대표 취임 100일을 맞은 그는 ‘스스로 당을 개혁하지 않으면 역사의 주체세력이 없다’고 말할만큼 지금의 보수를 혁신적 보수로 바꿔야 한다는 절박감을 안고 있는 것이다.   ‘보수의 새로운 가치와 보수의 혁신’이라는 시대적 공감대가 연결된 이들의 만남은 어쩌면 자연스러운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경북 영양에 뿌리를 둔 이문열작가가 지금 이시대, 이나라 제1야당 대표에게 ‘시대의 방향’에 대해 한수 말해줄수 있다는 것은 괜시리 고향사람들을 어깨 으쓱하게 만드는 듯하다.     그의 조상들의 숨결이 있는 두들언덕에는 이문열작가의 광산문학연구소가 있다. 중앙과 지역을 오가며 문학인을 양성하고, 시대적 혜안을 제시하는 그의 모습에서 보수의 본향이 어디이고, 시대적 중심이 어디인지 능히 짐작할수 있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작은 향촌 영양이지만, 저 두들언덕에서 세상을 가늠했던 청년 이문열이, 세월의 풍상을 넘어 지금 이시대, 세상의 중심에서 시대적 방향을 귀띰하는 현자의 모습으로 우뚝 서 있는 모습에서 우린 느낀다.   지역이 결코 중앙의 부속이 아니라 지역이 근본임을 많은이들은 실감할수 있다. 크고 화려한 것보다 작지만 강한 것이 더 가치가 있음을 우리는 안다. 내륙의 변방이 아닌 경북의 중심으로 새롭게 변신해야 하는 것은 지역민들의 몫이다. 시대적 혁신과 몸부림은 보수정당만이 아닌 지금 이시대를 살아가는 모든이들이 넘어야 하는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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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06-08

여론마당 검색결과

  • 〈일월칼럼〉 문향골 캠프에서 펼쳐지는 ‘별이 빛나는 밤에’
        『너와 내가 맹세한 사랑한다던 그말/너와 내가 맹세한 사랑한다던 그말   차라리 듣지 말 것을 애당초 가지 말 것을/사랑한다는 그말에 모든 것 다버리고   별이 빛나는 밤에 너와 내가 맹세하던말/사랑한다는 그말은 별빛따라 흘렀네   머나먼 하늘위에 별들이 빛나는 밤/그리워요 사랑해요 유성처럼 사라져버린 별이 빛나는 밤에 너와 내가 맹세하던말/사랑한다는 그말은 별빛따라 흘렀네   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별이 빛나는 밤에 별이 빛나는 밤에』   이제는 원로 가수이자 목회자의 길을 걷고 있는 가수 윤항기씨의 히트곡 ‘별이 빛나는 밤에’ 가사 전문이다.   여동생 윤복희와 불우한 어린시절을 보낸 윤항기가 청년시절인 1960년대, 작사작곡한 이 노래는 결국 일생일대 그의 출세곡이자 아직도 시대를 넘나들며 많은이들에게 사랑받는 인기대중가요다.   50대이상 중년이나 예순과 고희의 인생길을 오르내리는 어르신들에게 윤항기의 ‘별이 빛나는 밤에’는 머릿속에 각인된 오래된 레코드판처럼 흥얼거릴 수 있는 추억의 노래다.   연인과의 사랑과 이별의 무대는 별밤. 윤항기에게 별은 어쩌면 가장 빛나는 절정의 사랑이자 행복을 표현하는 정수임에 틀림없었을 것이다. 별은 변치 않는 맹세도 되었다가 하릴없이 흐르는 별빛은 또 이별의 모습이 되기도 한다.   이 노래가 반세기이상 대중적 인기도를 유지해온 비결도 바로 ‘별’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모든 이들은 가슴속에 저마다의 별을 간직하고 있다. 꿈이 되기도 했다가 사랑이 되고, 또 이별의 추억도 결국에는 별빛으로 담긴다.   가수 윤항기가 별로 청춘의 사랑과 이별을 그렸다면 프랑스 소설가 알퐁스도테 역시 세기적인 작품으로 평가받는 그의 소설 ‘별’에서 청춘의 사랑을 그렸다.   『나는 아가씨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그리고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저 수많은 별들 중 가장 가냘프고 빛나는 별 하나가 길을 잃고 내 어깨에 내려앉아 곤히 잠들었노라고...』    이 소설의 주인공인 목동의 어깨위에서 잠이 든 별은 스테파네트 아가씨다. 목동에게 그녀는 하늘의 별만큼이나 아름다운 사람별인 셈이다.   순박한 한 목동의 젊은 날의 사랑을 그린 이 소설은 천상과 지상, 별과 인간을 대비시켜 인간의 꿈을 아름답게 형상화한 서정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별이 없었다면 윤항기의 사랑과 이별, 알퐁스 도테의 양치기소년의 순정도 그려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배경이 된 마을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뤼브롱이다. 중세시대에 지어진 이 마을은 매우 높은 산지위에 자리 잡고 있어 밤하늘 별이 아름다운 곳으로 유명하다.   프랑스의 뤼브롱 만큼이나 아름다운 밤하늘을 간직한 곳이 경북 영양군이다. 이미 지난 2015년 국제밤하늘협회가 공인한 ‘별의고장’이다.   영양의 밤하늘 별과 반딧불이는 어디에서도 흉내 낼 수 없는 국보급 고유자산이다. 여름밤 영양 밤하늘에서 별을 바라보면 심연 속에서 우러나오는 영혼의 소리와 빛을 가슴가득 느낄 수 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하나에 사랑과/ 별하나에 쓸쓸함과/별하나에 동경과/별 하나에 시와/ 별하나에 어머니, 어머니/어머님, 나는 별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봅니다』    민족시인 윤동주의 명시 ‘별 헤는 밤’을 영양의 밤하늘에서는 절로 느낄 수 있다. 문향의 고장 영양의 모든 것을 음미할 수 있는 전통행사인 ‘문향골 캠프’는 그야말로 별을 노래하는 시간들이다.   이제는 별이 된 낭만시인 오일도와 지조시인 조지훈의 역사, 아직도 현존하는 문학의 큰별 이문열의 숨결이 살아있는 영양은 그 자체로 한국문학의 자존심이다.   장엄한 일월산과 깊고 그윽한 수비계곡의 신비, 영혼을 씻어주는 자작나무숲길은 왜 영양이 문학의 향기로 가득한 고장인지 알려주는 비경들이다. 주말 문향골 캠프는 잃어버린 나만의 별을 찾을 수 있는 마음채움의 시간들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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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2-07-27
  • [ 사설 ] 여름 피서, 영양으로 초대합니다
    코로나 시대 여름 피서를 고민하는 이들에게 상대적으로 코로나 청정지역인 영양을 추천한다.   산발적으로 확진자가 발생했지만 한자리수에 불과하고 그나마 대부분 외지에 주소를 둔 이들의 감염이었다.   경북지역 타 시군에 비해서도 영양군은 코로나 청정지역이다.   이런 영양군이 바로 코로나 시대 멋진 여름 휴가를 보낼 수 있는 곳이 아니겠는가.   어린시절 추억을 찾고자 하는 이들에게 ‘영양국제밤하늘보호공원’은 최고의 여름선물이 될 수 있다.   아시아에서도 가장 맑은 별을 볼수 있는 이곳에 오면 반딧불이 천문대에서 잃어버린 어린시절을 찾을 수 있다.   피로에 지친 도시민들에게 밤하늘보호공원은 그야말로 순백색의 자연을 오롯이 체험할수 있는 가족무대가 될 것이다.   뿐만인가. ‘문향의 고장 영양’ 이란 슬로건이 말해주듯 ‘승무’의 시인 조지훈생가와 현존 문학계의 거목 이문열의 생가가 있는 곳이기도 하다.   문학을 사랑하고 자연을 그리워하는 이들에게 이만한 관광코스가 어디 있겠는가.   수비면에 위치한 죽파리 자작나무숲도 알려지지 않은 보석이다.   하얀자작나무숲길을 따라 걷다보면 폐부깊숙이 찌든 스트레스와 삶의 찌꺼기들이 한꺼번에 씻겨나가는 신선함을 맛볼수 있을 것이다.   물놀이 장소도 즐비하다. 수하계곡과 선바위관광지는 예로부터 전통적인 여름 휴식처로 유명하다.   국립검마산자연휴양림은 가족단위의 관광객들이 많은 찾는 곳이다.   영양산촌생활박물관과 청송·봉화로 이어지는 외씨버선길을 걷다보면 여름더위와 코로나 걱정에서 해방될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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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1-07-21
  • [발행인 칼럼] 영양신문 창간 1주년에 부쳐!
    이기만 영양신문 발행인/(주)경북미디어 대표이사 이제 다음달이면 영양신문이 창간한지 꼭 1주년이 된다. 지난해 7월 3일 첫 창간호를 발간한지 어제 일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긴 하다싶다.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영양군민들의 성원과 격려덕분에 무사히 안착을 하고 지역신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향인 처럼 격의 없이 대해준 지역민의 덕분임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작은 군단위 영양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지역보다 영양에서 지역신문이 발간돼야 함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에서 지역신문이 없는 유일한 곳이 영양군과 울릉군이고 보니 필자는 우리지역 영양군에 우선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하고 명분 있는 일임을 자각해 오랜 준비 끝에 지난해부터 지역신문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   봄이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이 한올 한올 알토란같은 소식을 물어 집집마다 배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찾아뵙지 못한 가정도 많아 늘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언론인으로서 그것도 지방언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에 더욱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않은 게 현실이다.   당장 손쉬운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면 되는데 구태여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예의와 영양군의 자존심으로 내건 영양신문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비록 영양에 본사를 둔 작은 신문사이지만 어떤 지역신문과 견줘도 정당하고 분명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자칫 유혹에 빠지기 쉬운 금권과 편향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직 영양군민들의 언로(言路)의 역할에 충실한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음을 감히 자부해 본다.   우리지역 영양의 경우 젊은이 보다 어르신들이 많아 인터넷이나 SNS에 익숙치않아 지면신문이 정보습득에 훨씬 효용성이 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북도내 포항이나 구미, 안동 등 도시지역의 경우 젊은 층 인구가 많아 속도성을 자랑하는 인터넷사용을 많이 하고 이를 통해 정보습득을 많이 하지만 농어촌지역의 경우 아직까지 지면신문을 애용하는 실태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영양지역 곳곳을 누비며 신문을 배달하다보면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손을 맞잡아주시고, 고생한다고 음료수도 건네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인정을 영양에서는 흔치않게 볼 수 있는 것도 큰 횡재라 생각한다.   또 영양의 위대함은 바로 문향의 고장이라는데 있다. 민족시인 조지훈과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한국문학의 거목 이문열을 배출한 영양의 힘. 음식디미방으로 잘 알려진 경북의 어머니, 여류문학의 대명사인 장계향 선생의 저 두들언덕에 서면 왜 영양에 신문이 있어야 되는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본지는 지면신문과 인터넷 영양신문 등 이원화 시스템으로 지역뉴스를 공급하고 있는바, 인터넷으로는 매일매일 신속한 정보를 지역민들에게 알려주고, 지면신문은 격주 간으로 모아 집앞까지 배달하고 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보시기 편하도록 활자를 크게 해서 영양군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면도 많은 게 사실이다. 지역언론의 특성으로 군청 소식을 가급적이면 많이 실어서 영양군정을 지역민들에게 잘 홍보하는 역할도 겸용하고 있음을 말씀드린다.   언론이 비판기능에 충실해야 된다지만 먼저 정보전달의 매개체로서 충실히 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영양신문은 실천하고 있다.   오도창 군수님을 비롯한 영양군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이종열 도의원님, 김형민 영양군의회의장님과 의원님들의 성원과 격려에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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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20-06-04
  • [일월칼럼] 사람 없는 문향의 고장, 영양
    정승화 주필/편집국장 세상이 날로 험악해지고 있다. 부모가 자식을 죽이고 자식이 부모에게 해악을 가하는 천인공노할 범죄가 만연해지는 이 세상.   옛 어른들이 ‘짐승보다 사람이 더 무섭다’고 한 말이 헛말이 아닐 성 싶다. 어떤 곳은 사람이 많아서 탈이 나고, 또 어떤 곳은 사람이 없어서 두려움에 떨고 있다. 이래저래 우리네 인생사는 불안이 항상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운명인가 보다.   세상이 달라졌다. 먹을 것 입을 것만 있으면 행복하다던 말은 전설이 되고 이젠 배만 불러서는 행복할 수 없는 ‘삶의 질’을 논하는 시대가 됐다. 그러다보니 유행을 쫓아가게 되고 돈을 아무리 벌어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하는 ‘불행한 부자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인성의 시대가 가고, 물질의 시대가 오면서 우리들의 가치관도 흔들리게 됐다. 한 세기 전인 20세기만 해도 정신은 물질을 압도했다. 모든 것의 가치는 사람이 근본이었다.   문향의 고장 영양이 낳은 민족시인 조지훈과 한국문학사의 거목 이문열이 주목한 것도 바로 ‘사람’이었다. 사람의 가치는 바로 정신의 가치요, 이러한 정신은 바로 겨레의 자존이었다.   이 모든 것이 가능했던 것은 사람이 중심이었기 때문이다. 본격적인 산업화 시대가 도래하기 전인 지난1970년대 영양군의 인구는 역사 이래 가장 많은 7만7백여명을 육박했다.   대부분 농업에 종사하는 작은 시골지역에 7만여명의 인구가 밀집해 옹기 종기 살아간다는 것은 그 자체가 행복이었을 것이다. 먹을 것만 있고 잠잘 곳만 있으면 행복했던 그 시절, 물질은 정신을 따라갈 수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서울과 부산, 대구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공장이 들어서고 일자리가 늘면서 새로운 먹거리를 찾아 고향을 떠나는 이들이 늘면서 영양군의 위세는 반대로 작아지게 된다.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새로운 세상, 밥만 먹고는 살 수 없는 새로운 ‘질적행복’의 시대로 역사가 넘어가면서 오래된 고향은 그곳을 떠날 수 없는 부모님 세대의 땅으로 전락하고만 것이다.   산 좋고 물 좋은 내 고향은 추억 속에만 간직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 지금까지 영양의 아들딸들이 살아온 시간들이었다. 그 결과 이제 영원히 고향을 볼 수가 없는 운명의 시간들이 다가오고 있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영양이 인구절벽의 막다른 골목에 섰다. 야속한 시간은 잠시도 기다려주지 않는다. 아이는 없고 어른들은 매년 수백명이 영원으로 떠난다. 고향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정부와 언론에서는 시군소멸이니, 위기상황이니,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느니 말들을 하면서도 정작 뾰족한 근본해결은 없이 발만 동동 구르고 있다. 어쩌면 정부차원에서도 어디 사람 없는 곳이 한 두 곳 이어야 말이지 웬만한 경북과 강원, 전라남북도 등 시골지역에 가면 똑같은 현상이 벌어지고 있으니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모르는 상황인 것이다.   이 위기의 순간을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던지 영양군이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섰다. 최소한 인구 2만명이라도 회복하자는 것이 영양군의 복안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영양군을 샅샅이 뒤져 한명이라도 주소를 이전하지 않은 이들을 영양군민으로 만들고, 영양출신 출향인사들의 귀농과 귀촌, 주소지 이전 등 다각적인 대책마련이 필요하다는 게 영양군의 복안이다.   영양군의 이번 인구증가 범 군민 운동이 반드시 성공해서 사라지는 영양의 명맥을 유지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영양은 민족정신의 성지이다. 아무리 물질문명이 시대를 압도한다고 해도 영양군이 든든히 존재한다면 정신은 살아있는 것이다.   사람의 가치는 사람이 있어야 하고, 그 토대위에서 세상의 이치와 인심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영양군을 향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지금 영양군민들의 지상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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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2019-12-10
  • 【시론】 영양출신 인재는 많은데...
    추석이다. 어머니의 땅, 아버지의 숨결이 있는 고향을 찾는 이들이 많은 시간들이다. 영양에 뿌리를 둔 출향인들의 자부심은 뭘까.   궁벽한 경북내륙지역에서 태어나 경향각지에서 저마다의 노력으로 삶의 뿌리를 내린 출향인들에게 영양은 잊지 못할 노스텔지어이다.   비록 서울처럼 화려한 조명도 없고, 마천루같은 빌딩도 없지만 어린시절 추억을 담은 반딧불이가 희미하지만 생명의 빛을 내뿜고, 고향매미가 가을까지 울어대는 정겨운 곳일 게다.   그것뿐인가. 영양은 문향의 고장이라는 수식어가 말해주듯 민족시인 조지훈의 영혼이 서려있고, 영원한 낭만시일 오일도가 1백년의 모습으로 여전히 그의 고장에서 출향인들을 맞고 있다.   이문열은 어떠한가. 한국문단의 거장으로 ‘사람의 아들’을 비롯한 수많은 베스트셀러를 만들어낸 살아있는 영양의 얼굴이 아니겠는가. 이 나라를 움직이는 정치권에도 영양의 뿌리는 공고하다.   지난 정부에서 대통령의 최측근으로 활동하며 지금도 여전히 여야 정치권에서도 인정받는 실력자 이재오 전 의원 역시 영양출신이다. 한국사회에서 정치와 경제, 문화계 등 어느 곳이든 영양출신들이 없는 곳이 없을 만큼 그들의 영향력은 넓고 깊다.   이런 출세한 영양인들이 많지만 지금 그들의 고향, 영양의 현실은 날이 갈수록 어둠이 짙게 깔리고 있다.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형제자매들은 늙고 병들어가고 있다.   젊은이들이 도회지로 빠져나가 태어나는 아이들의 수는 급감하고 있다. 마치 땅속에서 나온 매미가 벗어버린 허물처럼 그렇게 껍질만 덩그러니 남아있는 모습이 영양의 현주소다.   풍성한 한가위 추석이지만 그들의 기억속 유년의 푸르름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영양을 살릴 방도를 찾아봐야 한다. 자식이 부모를 봉양하듯 이제 성공한 자식들이 고향을 돌봐야 한다. 일월산의 정기와 햇살을 받으며 자란덕분에 지금의 영광이 있음을 결코 잊으면 안 된다.
    • 뉴스투데이
    • 사회
    2019-09-16
  • 〈일월(日月)칼럼〉전통의 정신과 보수의 길!
       영양의 전통이 가득한 두들마을 입구 모습   좌파와 우파, 진보와 보수 등 이념논쟁이 끊이지 않는 21세기 한국사회. 이 아슬아슬한 진영간 논쟁의 틈바구니 속에서 한국문단 거장들의 언행이 눈에 띄고 있다.   한반도의 척추같은 백두대간의 중심, 경북 안동을 찾은 ‘칼의노래’ 저자인 소설가 김훈이 현대사회의 인간성 상실을 통렬하게 비판해 주목을 받았다.   지난 1일 개최된 제1회 백두대간 인문캠프 특강에서 펼쳐진 그의 강연에서 주목받은 대목은 ‘전통’에 대한 그의 시선이었다. 김훈은 ‘전통의 힘’을 무시하면 안된다고 말했다. 미래를 열어젖히는 힘이 전통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예컨대 자신만의 고요한 시간들, 즉 사유의 힘이 바로 사람의 힘이라는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사유의 힘을 스스로 가지려고 노력했으나 현대에 와서 그 고요함이 사라졌기 때문에 ‘인간미’가 사라지고 있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오랜시간 세상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역사를 통찰해온 문단의 노작가가 독설을 내뱉듯 풀어내는 세상에 대한 시선을 우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등 정치적 프레임으로 점차 고착화돼 가고 있는 사회풍토에 젖어있는 현대인들에게는 금과옥조같은 말들이 아닐수 없다.   나를 나로 인식하고, 너를 너로 인식하는 경계선, 그리고 그 적당한 선위에서 우리를 만들어내는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 이것이 바로 김훈이 보는 전통의 지혜일 것이다.   또 하나의 장면. 보수의 중심인 제1야당 자유한국당 황교안 대표가 지난 8일 소설가 이문열작가를 찾아간 것이 큰 화제를 모았다.   취임 100일, 보수의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선 황교안 대표가 자타가 인정하는 보수의 이론가 이문열 작가를 만났다는 자체가 이슈를 모으기에 충분했다.   ‘차한잔’의 만남이지만 이들의 만남은 ‘보수정당의 미래’와 ‘보수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한 대화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작가 이문열은 늘 ‘보수가 죽어야 보수가 산다’는 보수혁신론자로 잘 알려져 있다. 보수가 죽어야 한다는 것은 썩어빠진 관행이나 껍데기뿐인 잘못된 전통이나 사상을 배격해야 된다는 말일게다.   새로운 보수는 미래적 보수가 아니겠는가. 조상과 선대들의 지혜가 가득한 정통적 인간사회구현, 예와 덕이 살아있는 인문주의적 모습, 바로 그러한 보수가 이문열의 혁신적 보수라 능히 짐작이 되는 대목들이다.   결국 김훈과 이문열이 말하는 ‘전통’과 ‘혁신적 보수’는 그 맥락이 연결돼 있는 것으로 볼수 있다. 낡은 것을 버리고 지혜로운 전통을 이어받아 미래로 연결하는 것, 그것이 바로 인간미가 살아있는 혁신적 보수의 길이 아니겠는가.   〈정승화 취재/편집국장〉
    • 여론마당
    • 칼럼
    2019-06-12

기획특집 검색결과

  • (창간특집) 민족의 한(恨)을 울컥울컥 시(詩)로 토해낸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시인 오일도 시비  【정승화 기자】사람의 운명은 스스로 정하는 게 아니다. 나고 지는 일이 어디 힘쓴다고 될 일인가. 세상의 법칙은 우리가 알 수 없는 저 너머의 일이다.   어느 시대를 살아갈 것이며, 피 끊는 청춘을 어떻게 불사를지도 어쩌면 하늘이 정해준 시공간이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게다.   바야흐로 21세기. 세상은 첨단문명 속에서 정신없이 돌아가고 있다. 고요히 살고 싶어도 내 맘대로 살수 없는 치열한 생(生)의 사투. 우린 지금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악전고투하고 있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억압과 분노의 시공간에서 태어난 한 지성인(知性人)이 있었다. 궁벽한 경북 산골 영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유학해 철학을 공부 할 만큼 지성을 닦은 한 청년, 저항과 낭만의 시인 오일도를 아는가.   강압적 한일병합으로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36년의 세월, 그 시공간을 오롯이 살아온 조선의 지성, 자유를 잃어버린 식민지의 아들, 그 어두컴컴한 절망과 비탄의 심정을 속울음처럼 시(詩)로 울컥울컥 토해낸 저항시인이 바로 오일도로 알려진 오희병((熙秉) 이다. 일도는 그의 아호. 시인 오일도의 고향 마을인 영양군 입암면 감천리  △시인 오일도를 찾아가는 길  청송 진보방향에서 31번 국도를 따라 오일도가 태어난 고향, 영양군 감천리를 찾아간다. 도로변 가파른 절벽의 산이 아슬아슬 가슴 졸이게 하는 그 길을 따라 시인의 발자취를 쫓는다.   이 길이 아니면 들어갈 수가 없는 영양의 외로운 길, 시인 오일도의 삶은 어쩌면 영양의 외길과 닮아있는 듯하다. 도로 우측에 흡사 강물처럼 널찍한 푸른 냇물이 산 그림자를 보듬고 있다.   그 깊은 물길 사이로 보이는 몇몇 강태공들. 무슨 고기를 잡는 걸까. 푸른 하늘과 산이 병풍처럼 둘러싼 산하, 내륙의 섬이라는 영양의 별칭이 과히 틀린 말은 아닌 듯 온통 산과 구름이 낯선 이방인을 응시하듯 내려다보고 있다.   영양 경계로 들어선지 약10여분, 그의 고향마을 감천마을 표지판이 나온다. ‘문향의 고장’이라는 명성에 걸 맞는 영양문학테마공원이 입구에 있다.   청록파시인 조지훈, 소설가 이문열과 함께‘현대서정시인 오일도’푯말이 테마공원기념비에 새겨져있다.   조지훈과 이문열의 명성에 비해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은 시인 오일도, 그의 생애와 삶의 희로애락, 문학세계를 엿볼 수 있는「오일도시공원」이 바로 지척에 있단다. 단숨에 그를 만나러 발길을 돌린다. 마을어귀 연꽃풍경  △오일도 시공원 저기 누군가가 앉아서 책을 보고 있다. 멀리서 보니 신사복 차림의 멋진 모습. 앉아서 고개 숙여 책을 보고 있는 노신사.   이곳을 찾은 이가 또 있는가 보다. 그렇게 생각하고 조심스레 그에게 다가가 인사드리려 하니 그는 움직이지 않는다. 바로 ‘영원한 시인 오일도’였다. 시인은 청동의 신사복을 입고 청동의 책을 든 채 오늘도 시를 쓰고 있었다.   그의 옆으로 대표작 ‘지하실(地下室)의 달’이 시비에 아로새겨져 있다.   깊은 의자(椅子)에 / 허리가 빠졌다. / 담배연기 따라 저 천정 끝으로 / 가늘어지는 내시선(視線)한 손으로 / 늙은 종려수(棕櫚樹)를 휘잡노니 / 종려수! / 너도 고향(故鄕) 이 그리울 거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 밖에 두고 / 음휘(陰徽)의 지하실 한구석에 앉아 / 또 쓴잔을 손에 듦은 / 아! 내 영혼(靈魂)과 내 모자(帽子)는 / 막고리에 걸렸나니 / 새아씨여! / 갈 때에 부디 벗겨주오.     이 한편의 시(詩)만 봐도 시인 오일도를 알 수 있을 듯하다. 지하실의 달이라니, 그 속박된 식민지 시인의 비탄이 100년의 시공을 넘어 이방인의 가슴을 후려친다.   종려수 나무로 만들어진 죽은 의자의 희망이라니, 시인은 다리 부러진 종려수나무와 같은 자신의 신세, 일제의 탄압에 갇힌 서글픈 현실에 절망하고 있다.   하늘과 달과 구름은 그에게 있어 영원한 노스텔지어, 바로 고향의 하늘일 것이다. 유년시절 행복하게 뛰놀았던 자유로운 고향, 영양의 하늘과 별과 바람과 구름은 시인이 말하는 자유, 민족의 해방, 바로 그 꿈을 말하는 것이리라.   영원한 시인 오일도 동상 뒤편으로 그의 시 10여편의 시비가 서있다. 시인은 이제 지하실에서 나와 영원한 노스텔지어인 고향땅에서 그렇게 애타게 찾던 ‘자유의 달’을 맘껏 볼 수 있을 것이다. 시닝 오일도 동상과 시  △오일도 생가 여름이 시퍼런 땡감처럼 힘을 받아서인지 햇살이 따갑다. 청동으로 뜨거워진 시인의 몸에 살포시 손을 얹으며 그가 겪었던 시대의 아픔을 손바닥 가득 느껴보았다.   그 터질 듯 한 억눌림과 피 끊는 열정이 어떤 아픔인지 7월의 열기가 가감 없이 뜨겁게 온몸으로 전해진다. 때마침 솔바람이 저 계곡능선에서 손님을 맞으러 황급히 달려오고 있다.     매미의 울음소리가 창공으로 시를 읊는 시인의 목소리처럼 환상이 되어 퍼진다. 시인이 지하실에서 그렇게 그리워하던 고향의 산하가 저기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저 끝없는 창공위에 시인은 영원한 사람이 되어 자유의 시를 쓰고 있을 것이다. 바람이 시가 되고, 구름이 그림이 되는 그곳, 시 공원 인근에 있는 시인의 생가로 발길을 옮긴다.   잘 정돈된 어머니의 된장 단지처럼 소담스럽게 자리 잡은 감천리 마을. 입구에서 만난 한 촌부는 “이곳이 낙안오씨 집성촌인데 지금은 50호 정도만 살고 있다”고 말했다.   먹고 살기위해 하나둘 세상 밖으로 나가고 이젠 고령의 주민들만 고목껍질처럼 세월을 지키고 있는 그곳. 마을 안으로 들어서니 시인이 나고 자란 생가고택이 눈에 들어온다.   솟을대문의 찬연한 고택 기왓집, 대문 양옆에 접시꽃이 새색시의 연지 꽃처럼 빠알갛게 물들어 있다. 시인 도종환이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며 쓴 ‘접시꽃 당신’. 한편의 시가 전 국민을 울렸던 그 접시꽃이 오일도 생가(生家)에 피어있다.   지금 그리운 이는 시인 오일도, 사무치는 그리움처럼 접시꽃의 붉은 자태가 서글프다. 경북문화재 제248호로 지정된 오일도 생가는 세월의 풍상으로 색은 바랬지만 ‘지조’와 ‘역사’를 보여주듯 의연하다. 그의 조부가 살아생전 건립했던 44칸의 고택 앞에 태극기가 휘날린다.   경북문화재 표식으로 보이지만 일제의 압박에도 굴하지 않았던 시인 오일도의 ‘지조’와 ‘절개’지성인으로서의 ‘외길’을 알려주려는 듯 그 펄럭임이 맹렬하다. 시인 오일도 생가  △오일도의 생애 시인 오일도의 생애는 불운했던 일제치하의 시기와 거의 일치한다. 20세기가 시작되는 1901년에 태어난 그는 14살까지 영양에서 한문공부와 영양보통학교를 다니다 15세의 이른 나이에 결혼을 했다고 한다.   그 후 서울에 있는 경성제일고등학교에서 재학 중 졸업하지 않은 채 23살 무렵인 1922년 일본으로 건너가 릿교대학(立敎大學) 철학부에서 유학생활을 하고 서른 살 무렵인 1929년 졸업 후 고국으로 돌아온다.   타고난 천재 시인 오일도의 문학인생은 20대 중반 무렵인 1925년 조선문단(朝鮮文壇) 4호에 그의 시‘한가람 백사장에서’를 발표하면서 시작됐다.     일제의 폭정이 극을 치달았던 당시 지성인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었겠는가. 그는 잠깐 동안의 교편생활을 끝으로 시(詩) 잡지제작에 승부를 건다. 바로 한국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詩苑)’의 탄생배경이다.   돈 없는 그에게 잡지를 창간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고향을 지키던 맏형. 1935년 마침내 세상에 나온 시원1호 창간호는 시인 오일도 문학세계의 전부이자 절정의 시기라 할 수 있다.   “문학이 그 시대의 반영이라면 문학의 골수(骨髓)인 시는 그 시대의 대표적 울음일 것이다. 그러면 현재 조선의 시인이 무엇을 노래하는가? 이것을 우리는 여러 독자에게 그대로 전하여 주고자한다”시인 오일도가 시원(詩苑)’창간호에 쓴 편집후기이다. 오일도 시인   이렇듯 그는 시를 통해 ‘시대정신’과 지성인이 해야 할 역할이 무엇인지를 분명히 명시하고 있다. 시원의 창간 역시 궁극적으로 일제에 저항하고자 하는 뜻이 내포돼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 오일도는 가장 왕성한 창작열을 불태웠다.「노변(爐邊)의 애가(哀歌)」·「눈이여! 어서 내려다오」·「창을 남쪽으로」·「누른포도잎」·「벽서(壁書)」·「내연인이여!」등을 잇 따라 발표하고 다수의 시 및 한역시도 발표했으나 정작 자신의 시집은 한권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오일도의 꿈은 그해를 넘지 못했다. 창간호가 나온 지 10개월 후 인 그해12월, 최초의 시 전문잡지 시원은 5호를 마지막으로 발행이 중단된다.   이후 태평양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면서 그는 1942년 고향인 영양으로 돌아와 수필을 쓰며 칩거하는 시간들을 보낸다.   마침내 해방.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그가 그토록 갈구하던 자유의 나라, 해방된 조국을 되찾으면서 오일도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중단됐던 ‘시원’의 복간을 위해 동분서주했으나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한다.   괴로움에 폭음의 나날을 보내던 그는 결국 광복 다음해인 1946년 45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난 한 지성인이 시대에 굴하지 않고‘저항’으로 맞서며 한결 같이 꼿꼿한 모습으로 자연을 노래하고 인생을 표현한 시인 오일도.   그의 불꽃같은 생애를 보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 이 시공간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위해, 어떤 열정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서정시인 오일도의 고향 감천마을  
    • 뉴스투데이
    • 문화
    2019-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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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객원칼럼〉주말 영양사용설명서
        2022년(壬寅年) 새해가 밝았지만 3년째 이어오는 코로나19는 우리네 삶의 질을 저하시키고 있다. 이제는 대면과 비대면의 소통과 양자 간의 균형에 맞춘 새로운 페러다임의 구축이 필요한 시기이다.   이른바 대면과 비대면으로 각자의 소통 역할은 물론 교류하는 인간(homo communicans) 즉 공감할 수 있는 소통의 장이 마련돼야 한다. 많은 사람들은 저마다의 꿈과 희망을 계획하며 신년의 포부를 이야기하지만 우리 주변에는 코로나19로 인한 상실감과 정서적 우울감이 현실로 나타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소통과 공감이라는 것이 타인과 세상을 보살피는 따뜻한 힘이지만, 과도하게 짊어지게 되면 마음이 지쳐 자기 번아웃(burnout·극도의 정신적 피로나 무기력)이 찾아올 수 있다. 특히, 합리적 결정과 조언이 흔들려 타인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다.  따라서 문화가 주는 정서적 안정, 지적소유와 힐링의 포인트가 큰 자리를 차지한다.   문향의 고장 영양군이 주는 다양한 문화공간은 역사적으로 위엄이 강하며 시대정신이나 문학 사상을 접할 수 있는 곳이 많이 있다. 맑은 밤하늘의 별빛을 수놓은 아시아 최초 국제 밤하늘 보호공원, 죽파리 자작나무숲길, 선바위 관광지등 자연의 신비로움을 비롯해 역사를 공부할 수 있는 장계향 문화체험교육원, 산촌박물관, 조지훈문학관, 오일도 시비공원, 이문열문학관이 조성되고 있어 문향의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복합문화공간으로 부족함이 없다.     영양군의 대표적인 학자이며 시인인 승무의 저자 조지훈(1920~1968)선생의 지훈문학관이 주실마을에 자리하고 있다. 주실마을은 한양 조씨 집성촌으로 주실마을 북쪽에는 일월산(日月山)이 있고 그 옆으로는 문필봉(文筆峰)과 연적봉(硯滴峰), 노적봉(露積峰) 등 해발 200m 높이의 봉우리가 마을을 둘러싸고 있으며 반변천이 흐른다.   마을 입구에는 수백 년 된 느티나무와 소나무 등으로 조성된 ‘주실쑤’라는 울창한 숲이 있다. 주민들이 직접 나무를 심어 오늘날까지 가꾸어 온 것으로 장승을 뜻하는 사투리를 섞어 ‘수구막이 숲’ 혹은 ‘생명의 아름다운 숲’으로 불리기도 한다.   문필봉은 말 그대로 붓을 닮아 뾰족한 삼각형 모양을 띄고 있다.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봉우리로 문필봉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학자가 나온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며 실제로 조동원박사, 조동길교수, 국문학자였던 조지훈교수 등 수많은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지훈문학관은 현대를 살아가면서 소신을 가지고 흔들림 없이 의연할 수 있음을 배울 수 있는 소중한 곳이다. 청록파시인으로 일반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4.19혁명의 불꽃을 지피고 추상같은 질책으로 지조 있는 삶을 외친 논객이요, 한국의 민족문화사를 재정립한 민속학자라는 사실과 일제 강점기 이후 험난한 역사적 현실아래 선비의 지조와 열정을 지니고 살아온 삶을 통해 이 시대가 요구하는 지성인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는 학습의 공간이며, 주실마을과 문학관을 탐방하며 자신을 한번쯤 돌아볼 수 있는 문화공간이라 추천하고 싶다.   지훈시공원은 주실마을의 뒤편에 조성되어 둘레 길처럼 걸으며 시를 읊고 심신의 안정과 한옥들의 고즈넉한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다. 이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럽게 시인이 된 듯 지훈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빛을 찾아가는 길  - 조 지훈 - 사슴이랑 이리함께 산길을 가며 바위틈에 어리우는 물을 마시면 살아 있는 즐거움의 저 언덕에서 아련히 풀피리도 들려오누나 해바라기 닮아가는 내 눈동자는 紫雲(자운) 피어나는 靑銅(청동)의 香爐(향로) 동해 동녘바다에 해 떠오는 아침에 북받치는 설움을 하소하리라 돌부리 가시밭에 다친 발길이 아물어 꽃잎에 스치는 날은 푸나무에 열리는 과일을 따며 춤과 노래도 가꾸어 보자 빛을 찾아가는 길의 나의노래는 슬픈 구름 걷어가는 바람이 되리.      조지훈이 가졌던 선비로서의 품격과 빛을 찾아가는 삶의 발자취는 어떠한 경우에도 재물과 사람과 문장을 빌리지 말라는 선대로부터의 대물림된 삼불차(三不借)의 가르침이 아닐까. 삼불차의 정신은 주실마을에 세거를 정한 한양 조씨들의 자존심의 발로이자 근대사의 굴곡을 헤치고 빛을 찾아가는 삶의 지표이다.    인생은 어둠속에도 광명한 빛을 찾아가는 길이기에 새로운 생각들은 아름다운 세상을 밝히는 힘이 된다. 좁고 어두웠던 삶이 강한 인내 속에 혹독한 추위마저 이겨냈을 때 비로소 따스한 봄 햇살이 우리 곁으로 찾아와 심장에 물든 새싹들을 푸르게 꽃피우듯이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어둠속에서도 광명한 빛을 찾아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어가기를 희망해 본다.  (조지훈문학관장/시인 양 희)        
    • 우리동네 새소식
    • 동정
    2022-01-27
  • [발행인 칼럼] 영양신문 창간 1주년에 부쳐!
    이기만 영양신문 발행인/(주)경북미디어 대표이사 이제 다음달이면 영양신문이 창간한지 꼭 1주년이 된다. 지난해 7월 3일 첫 창간호를 발간한지 어제 일 같은데 세월이 참 빠르긴 하다싶다.   그동안 어려움 속에서도 영양군민들의 성원과 격려덕분에 무사히 안착을 하고 지역신문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이 모든 것이 고향인 처럼 격의 없이 대해준 지역민의 덕분임에 다시 한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자 한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작은 군단위 영양이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어느 지역보다 영양에서 지역신문이 발간돼야 함은 자명한 일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국내에서 지역신문이 없는 유일한 곳이 영양군과 울릉군이고 보니 필자는 우리지역 영양군에 우선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타당하고 명분 있는 일임을 자각해 오랜 준비 끝에 지난해부터 지역신문으로 인사를 드리고 있다.   봄이면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듯이 한올 한올 알토란같은 소식을 물어 집집마다 배달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찾아뵙지 못한 가정도 많아 늘 송구스럽고 죄송한 마음이다.   언론인으로서 그것도 지방언론인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움이 많은 게 사실이다. 특히 요즘처럼 SNS가 발달한 시대에 더욱 언론의 역할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않은 게 현실이다.   당장 손쉬운 인터넷으로 정보를 주고받으면 되는데 구태여 지면신문을 발행하는 수고로움을 감내하는 것은 그만큼 지역에 대한 예의와 영양군의 자존심으로 내건 영양신문의 존재이유이기 때문이다.   본지는 비록 영양에 본사를 둔 작은 신문사이지만 어떤 지역신문과 견줘도 정당하고 분명한 자세로 걸어오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다.   자칫 유혹에 빠지기 쉬운 금권과 편향의 유혹에 빠지지 않고 오직 영양군민들의 언로(言路)의 역할에 충실한다는 가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음을 감히 자부해 본다.   우리지역 영양의 경우 젊은이 보다 어르신들이 많아 인터넷이나 SNS에 익숙치않아 지면신문이 정보습득에 훨씬 효용성이 큰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경북도내 포항이나 구미, 안동 등 도시지역의 경우 젊은 층 인구가 많아 속도성을 자랑하는 인터넷사용을 많이 하고 이를 통해 정보습득을 많이 하지만 농어촌지역의 경우 아직까지 지면신문을 애용하는 실태가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영양지역 곳곳을 누비며 신문을 배달하다보면 어르신들이 고맙다며 손을 맞잡아주시고, 고생한다고 음료수도 건네주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사람 사는 세상에 꼭 필요한 인정을 영양에서는 흔치않게 볼 수 있는 것도 큰 횡재라 생각한다.   또 영양의 위대함은 바로 문향의 고장이라는데 있다. 민족시인 조지훈과 낭만의 저항시인 오일도, 한국문학의 거목 이문열을 배출한 영양의 힘. 음식디미방으로 잘 알려진 경북의 어머니, 여류문학의 대명사인 장계향 선생의 저 두들언덕에 서면 왜 영양에 신문이 있어야 되는지를 다시 한번 절감하게 되는 것이다.   본지는 지면신문과 인터넷 영양신문 등 이원화 시스템으로 지역뉴스를 공급하고 있는바, 인터넷으로는 매일매일 신속한 정보를 지역민들에게 알려주고, 지면신문은 격주 간으로 모아 집앞까지 배달하고 있다.   연세가 많으신 어르신들이 보시기 편하도록 활자를 크게 해서 영양군에서 일어나는 소식을 하나라도 빠트리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지만 아직까지 부족한 면도 많은 게 사실이다. 지역언론의 특성으로 군청 소식을 가급적이면 많이 실어서 영양군정을 지역민들에게 잘 홍보하는 역할도 겸용하고 있음을 말씀드린다.   언론이 비판기능에 충실해야 된다지만 먼저 정보전달의 매개체로서 충실히 하는 것이 우선돼야 함을 영양신문은 실천하고 있다.   오도창 군수님을 비롯한 영양군 공무원들의 적극적인 협조와 이종열 도의원님, 김형민 영양군의회의장님과 의원님들의 성원과 격려에도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 여론마당
    • 칼럼
    2020-06-04
  •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출처=영양군)   【정승화 기자】영양군문인협회(회장 양희)가 주관하는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가 7월 27일부터 28일까지 자연생태공원에서 개최됐다.   문향골 문학캠프는 오일도, 조지훈, 이문열로 이어지는 문학의 맥을 계승하고 문학적 소질을 개발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 매년 개최하는 문학행사로 자유롭게 문학을 논하고 창작하며, 문향의 고장을 몸과 마음으로 느낄 수 있는 행사다.   이번 문학캠프는 “사람과 자연을 이어주는 상상력”이라는 주제로 김선굉 시인의 문학특강과 김경종 선생의 “그리움도 가져가!”, 정중수 교수의 “조지훈과 지조론”등의 문학 강연이 이어졌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또한 별빛이 아름다운 국제밤하늘 보호공원 내 반딧불이 천문대 탐방과 자연생태공원 산책 등 자연 속에서 문학의 소양을 높이는 시간과 문학캠프 체험을 글로 표현하는 백일장을 갖는 등 문학과 자연을 함께하는 일정에 더해 지훈문학관 탐방으로 진행됐다.   양 희 영양문인협회 회장은 “해를 거듭할수록 커져가는 참가자들의 뜨거운 관심과 참가 열의로 문향의 고장을 알리는 문학행사로 자리매김할 수 있어 감사하다.”며 “앞으로도 많은 분들의 문학행사에 대한 많은 관심과 참여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제15회 문향골 문학캠프 모습  
    • 뉴스투데이
    • 문화
    • 종교/학술
    2019-07-26
  • 인터넷 영양신문 창간 인사말씀
    존경하는 영양군민 여러분!사랑하는 경북도민 여러분!  태백준령의 계곡을 따라 동해바다로 가는 길목, 경북의 중심에 자리잡은 영양에서 마침내 뉴미디어시대에 걸맞는인터넷 영양신문이 문을 열었습니다.  역사개창이래 수많은 말(言)과 글(書)이 모이고 흩어져 정처없는 솔바람, 하릴없는 햇살처럼 허무했던 지난날들. 그 인심의 오랜 인내 끝에 마침내 영양군민들의 소리통이 빛을 보게 됐습니다.   인구 1만7천여명의 작은 향촌도시 영양이지만, 말과 글은 이 나라를 이끌어온 힘이었습니다.  민족이 바람앞에 촛불처럼 고난을 겪었던 일제치하와 해방정국의 칼날위에서도 영양이 낳은 시인 조지훈은 민족의 지조를 지켰고, 두들언덕에서 일월산을 보며 세상을 가늠했던 소설가 이문열은 지금, 한국문학의 거장으로 우뚝솟아 있습니다. 경북의 어머니, 여류문학의 대명사인 장계향 선생은 또 어떻습니까. 음식디미방으로 잘 알려진 영양의 두들마을에는 한국 최초의 한글음식조리서 저자인 어머니 장계향의 손맛이 오롯이 배어있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말과 글의 역사라고 본다면 영양은 역사의 근본지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나라의 민족정신과 문학의 뿌리를 찾는다면 바로 ‘승무’의 시인 조지훈과 ‘사람의 아들’로 세상에 우뚝 선 이문열이 그 출발점이라 하는데 어느누가 부정하겠습니까. 이 장구한 역사 앞에 선 영양이지만 지금까지 한번도 ‘말과 글’을 담는 그릇이 없었습니다. 이제 본보 「인터넷 영양신문」이 그 운명을 대신하고자 합니다. 일월산을 타고 내려온 저 청정수처럼 맑고, 빛깔 찬 영양고추를 만들어낸 저 찬란한 햇살 만큼 밝은 소리통이 되겠습니다.   말(言)을 똑바로 할 수 있는 언론이고자 합니다. 글(書)을 바르게 쓰는 정론(正論) 언론이고자 합니다. 잘못된 말과, 비뚤어진 글로 불통이 되어가는 사회를 소통사회로 바꾸고자 합니다.  일월산의 정기를 타고 내려온 저 푸르디푸른 영양의 하늘과 맑은 공기, 쉼 없이 곳곳에 살포시 내려앉는 빛깔 찬 햇살을 이웃들에게 올곧이 홍보하는 전달자가 되겠습니다.  햇살 뒤에 숨은 어둠을 밝히겠습니다. 계곡 아래로 떨어지는 바윗돌의 방향이 정처 없듯이 이말 저말 혼탁한 언어로 반목과 질시로 갈등을 빚는 지역사회의 역결을 바로잡겠습니다. 영양과 청송, 안동과 예천, 포항과 영덕,  구미와 문경 등 경북사람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달려가는 솔바람 같은 청정 언론이 되겠습니다.   그리하여 영양이 세상과 소통하는 중심이 되도록 하겠습니다. 내륙의 섬이 아닌 경북의 중심으로, 단절과 고립된 지역이 아닌 연결과 개방의 새로운 출발지가 되도록 바꾸겠습니다.    일월산의 높은 꿈과 산나물의 향취, 따스한 햇살만큼이나 가득한 인심으로 「돈과 사람이 몰리는 영양」이 되도록 인터넷 영양신문이 그 선봉에 서겠습니다. 인터넷 영양신문에 이어 조만간 지면 영양신문으로도 여러분을 찾아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인터넷 영양신문 발행인/(주)경북미디어 대표이사 이기만 드림  
    • 우리동네 새소식
    • 인사
    2019-0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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